잘 살아, 고모
고모의 분노의 포효는 미국 영토 안에서 사그러들지 않았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닿았다. 이 정도면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 못지 않으니
분노가 뿜어내는 화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모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활 걸어 버르장머리 없는 조카-나-의 만행을 고자질 하고,
그 분한테 나의 엄마에게 연락해서 네 딸이 이렇게 자신을 무시했음을 알릴 것을 종용했다.
엄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허해졌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땐 전화번호를 몰라서 연락을 못했다는 핑계를 댄 고모였다.
고모는 자기가 이렇게 화가 났음을 온세상에 알리고 싶어했다.
마치 바닥에 드러누워
‘이렇게 화가 난 나를 봐달라고! 빨리 나를 안아서 나를 달래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발버둥치는 다섯살 짜리 어린애 같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고모는 다섯 살이었다.
아빠가 할머니가 돈을 빌려줬던 사람에게 돈을 받으러 갔다가 허탕치고 집으로 왔을 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아빠는 중학생이었다.
마당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살 고모가 놀고 있었고,
할아버지 옆에서 큰고모는 할머니를 앞에 두고 엉엉 울고 있었다.
아빠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자전거를 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장례를 치르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오십년 대에 태어난 엄마없는 다섯살짜리 여자애가, 고작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던 오빠, 언니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고모에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주는 사람도, 달래주는 이도, 안아줄 누군가도 없었다.
어쩌겠어. 어렸던 아빠와 큰고모는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고달프고 힘들었을 텐데.
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결정한다.
한 개인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몰고가는 경우를 나이가 들면서 자주 목격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떼를 쓰고 우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을 접하지 못한다면
그걸 삶의 방식으로 택할 수 밖에.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다섯 살 어린애가 울며불며 바닥을 뒹굴면 양육자는 조금 떨어져서 아이가 진정되길 기다린다.
땡땡이는 여기서 살아, 나는 집에 갈거야 하면
아이는 놀라서 더 크게 울부짖지만 한편으론 앗 이젠 그만해야 할 땐가 보다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울부짖음 단계에서 흐느낌으로 서서히 브레이크를 건다.
그러면 양육자는 다가와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합의를 한 후,
손을 잡고 같이 집으로 향한다.
그 후로도 양육자와 아이는 세월을 함께하며 둘만의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겠지.
나와 고모는 그러지 못했다.
고모는 여기서 잘 살아, 나는 집으로 갈거야 로 끝나버렸다.
늦어서 미안해 고모.
그래도 잘 살라는 말은 진심이야 고모.
잘 살아, 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