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팔 년 동안 한국 신생아 여자이름 1위였다.
게다가 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의 여주인공 이름도 서연이었다.
팔십 년대 한국에서 여자 이름 중 ‘-자’로 끝나는 고유명사가 많았던 현실을 반영해
영화 제목을 <영자의 전성시대>로 짓거나, <고래사냥> 속 여성캐릭터에게 ‘춘자’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건축학개론>도 그렇게 이름을 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세월이 정말 오래 흐르고 나서 전성기를 맞긴 했네요,
그런데 잘 나가는 건 이름 두 글자가 아니라 이름의 소유자여야 하지 않나요, 뿌엥.
아무튼, 여자주인공 이름이 서연이라서 그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작품 속에선 제주도 출신의 양서연이라고 설정되어 있었다.
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실제로 양 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점을 참고했을 것이다.
‘서연’이 주인공인 <건축학개론>은 대박이 났다.
네, 이번에도 대박이 난 건 제가 아니군요, 이젠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많아지자, 나는 사람들에게
“<건축학개론> 여자주인공 이름이 서연이야! 나랑 똑같아!” 신이 나서 눈을 반짝이며 말하고 다녔다.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의 반응은 백이면 백 다 똑같았다.
다들 예의를 잘 지키는 편이라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어쩌라고.
눈을 몇 번 껌뻑거리고 나면 다음 문장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나온 여주는 수지랑 한가인인데 얘는 왜, 굳이, 지 무덤을 지가 파는 걸까.
지금 본인 눈앞에 보이는 내 얼굴과, 추후에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게 될 수지, 한국의 올리비아 핫세라는 별명이 붙었던 한가인의 외모를 번갈아 비교하며 떨떠름해하던 너희들, 누구였는지 나 다 기억한다.
나도 알아, 안다고!
그러고 보니 이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나네.
내 정신건강에 해로울까 봐 뇌가 알아서 삭제해 버린 걸까.
그래도 <건축학개론>을 보던 어느 한순간만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건축학개론> 중 한 장면
......
(중략)
승민 서연이, 걔 열라 귀엽거든
웃기만 하는 납득이
승민 진짜, 졸라 이쁘거든
고백할 용기가 생긴 승민은 ‘서연아!’ 크게 외친다.
동네방네 떠나가도록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다.
서연아! 서연아!
(참고: 위 단락은 실제 시나리오 인용이 아닙니다. 해당 장면을 떠올리며 제가 직접 썼습니다.)
서연을 향한 사랑이 듬뿍 담긴 승민의 목소리가 극장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서연에게 들킬까 봐 꼭꼭 눌러두었던 승민의 마음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주인공이 하트 뿅뿅인 눈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만 봐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데, 그 이름이 내 이름이라니. 사랑이 뿌려진 극장 안 공기가 너무나 포근해서 그 안에 폭 안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극장에 한 번 더 갔다.
언제든 그때 그 공기를 꺼내어 안길 수 있도록 그 순간의 조명, 온도, 습도를 고스란히 저장해 두었다.
내 이름이 서연이라서 좋았다.
할아버지에게 첫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아빠,
그 철학관에 가서 작명을 의뢰한 할아버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서연’이라는 두 글자를 조합해 주신 철학관 선생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평생 간직할 반짝이는 기억 하나 채워놓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