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따분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감정 컨트롤 본부 스피커에서 누군가가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소리가 나온다.
감정들이 모니터를 보니 엘리가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낀 채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기쁨 “와! 따분아! 그새 과학 팟캐스트를 틀고 있었던 거야! 정말 멋지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따분이. 조이스틱으로 다음에 들을 과학계 최신뉴스를 고르고 있다.
기쁨 “이번이 두 번째 듣는 건데 이번에는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설레는 얼굴이다.
…
…
기쁨 “음, 따분아?”
따분 “왜에에에-”
기쁨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따분 “당연한 거야. 양자역학은 다들 들어도 들어도 몰라.”
기쁨 “아니, 그게 아니라…”
기쁨이가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기억소환튜브에서 파란 구슬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슬픔이와 당황이를 제외한 나머지 감정들은 구슬에 맞을까 봐 구슬비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아까부터 제어판에 엎어져있던 슬픔이는 등짝에 구슬이 튕겨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에라 모르겠다는 심경이 되어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만다.
당황이는 어디선가 커다란 양동이를 구해와서 파란 구슬들을 쓸어 담는다.
불안이 비명을 지른다.
불안 “뭐야! 또 왜 이러는 거야!”
까칠 “엘리가 빵을 꺼내다가 환자복을 입고 있던 아빠모습을 떠올렸어!
아빠생각 안 하려고 팟캐스트 듣고 있는데 지금 엘리 마음 상태로는 양자역학 설명이
이해하기 버거운 가봐.
괜히 파란 구슬만 건드리는 바람에 거꾸로 빨려 들어온 거라고!”
슬픔 “난 아니야, 구슬 소환한 적 없어. 제어판이 고장 나서 제멋대로 작동해서 그런 거야”
기쁨 “내가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이 그거였어. 단기기억장치까지 이어지는 튜브가 작동을 멈췄나 봐.
귀를 통해 들어온 정보가 단기기억저장소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각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고 있어.”
슬픔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나와서 뺨을 타고 내려와 제어판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 모습을 본 당황이가 얼른 슬픔이를 일으킨다.
눈물이 제어판 안쪽으로 들어가서 더 고장 내는 걸 막기 위해서.
당황 “따분아, 다른 거 틀어줘.
엘리가 챙겨 듣던 공감 가는 이야기 많이 해주는 팟캐스트 있었잖아.
그거 들으면서 엘리가 위로받은 적 많으니까 빨리 바꿔줘.”
다른 감정들은 당황이가 이렇게 말을 많이, 빨리하는 모습에 놀라 그 자리에 멈추었다.
당황 “선율이 앞에서 또 울기 싫다고. 아침부터 눈물보이기 싫다고.
오늘 선율이 삼 학년 첫날인데 엄마가 우는 걸 보고 학교에 가면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어.
우리도 겪어봐서 잘 알잖아.”
파란 구슬이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당황이를 대신해 다른 감정들이 파란 구슬을 한쪽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따분이가 빠르게 화면을 스크롤하던 손을 멈추고 클릭한다.
에피소드 제목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감정 컨트롤 본부에 울려 퍼지자 마음속 지진도 멈추었다.
파란 구슬 폭포도 멈췄다. 당황이는 지친 슬픔이를 들어 리클라이너 소파에 눕혔다.
엘리는 팟캐스트에 귀 기울이며 출렁였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웃는 얼굴로 무사히 선율을 등교시켰다.
모든 감정들이 다 같이 끌어안고 서로 격려해 주었다.
그런데 본부가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지?
본부가 무너질까 두려운 소심은 기둥 하나를 껴안았다.
소심 “따분아, 너 잘 못 고른 거 아니야?”
따분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음 전체에 폭우가 쏟아졌다.
그 새 슬픔이가 제어판을 조작하고 있나? 제어판 쪽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슬픔이는 리클라이너 소파에 기대 퍼져 있었다.
슬픔이는 고개만 살짝 들어 어리둥절해하는 감정들을 보며 말을 꺼냈다.
슬픔 “따분아, 그것도 꺼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다 부서진 지 얼마 안 돼서 조금만 마음을 건드려도 무너지나 봐.
봐, 제어판도 이제 완전히 고장 나서 내가 만지고 있지 않는데도 엘리가 울고 있잖아.
슬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리고 있다고.”
모니터 속 엘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고 있었다.
따분이는 조용히 재생정지 버튼을 눌렀다.
엘리는 약 한 알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장대비가 그친 마음속은 어두워졌다.
슬픔 “엘리가 자려나 봐. 우리도 좀 쉬자.”
불안 “응, 오늘 개학날이라 좀 일찍 오긴 하지만 선율이가 올 때까지 세 시간은 남았어.”
시간표를 체크하며 불안이가 모두를 안심시켰다. 감정들 모두 침실 안 자기 자리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그래도 해야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던 엘리는 몸을 일으켰다.
할 건 해야지.
엘리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려는 몸을 질질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