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일
조금 더 어릴 때 ‘영원도 모르는 것’ 이라고 써놓은 시가 있다.
내 아무리 전달하려 해도, 온전히 내 마음을, 영원히 떠들어도, 영원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받은 상처를 거름삼아 피어난 시였다. 성경 속의 예수도, 구전 속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늘 다른 해석을 내놓고 추측하듯이 말이다.
내 상처받고 흉터난 이 자국을 보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표현을 영원토록 떠들어도, 다른 사람은 절대 온전히 알 수 없다. 신화 속 하늘의 별자리 되어 영원히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들처럼, 내가 되고, 네가 되어도 서로의 시간을 무지의 상태에서 다 겪어보아도, 아마 절대 온전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만의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문득 ‘찰나가 영원이 될 때’라는 노래 제목처럼 영원은 어느 순간이 영원하게 될 때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 감히 영원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 채 원망했구나 싶다. 영원할 수 없는 것도 영원히 계속되고, 영원하리라 하던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게 영원이니까.
나의 또 다른 시에는, 영원하지 못하더라도 '다시'를 약속해달라고 하지만 그 약속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래서, 영원한 것을 바라지 않으려 하다보면 또 다시 영원을 바라게 된다는 구절이 있다. 영원은 구속하고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이렇게 뒤늦게 깨우친다.
물고기자리는 신화를 모티브로 두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별자리 이름이다. 나는 그 별자리가 민들레 홀씨 터트려놓고 바람에 흩날리지 않고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또 나만의 신화를 써내려 가본다.
영원하지 않아 아름다운 예술과 영원에 가까워서 추앙받는 다이아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모습이 변하지 않으면 그 가치나 의미가 변하고, 모습이 변해도 그 가치나 의미가 변하지 않는 것도 생각한다. 변질도 영원의 과정이라 생각해본다.
나의 사랑, 나의 부모님은 영원치 않으나, 나에겐 영원히 사랑하는 가족임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라고 깨달은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