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기, 나호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 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 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신체적인 접촉을 넘어 ‘나는 너를 이해해. 너의 모든 상황과 감정을 전부 이해해.’라는 마음을 온몸으로 전달하는 게 아닐까?
‘안아주기'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어둠도, 무량한 허공도, 슬픔도, 미움도 안으면 따뜻해진다. 두 팔을 벌려 상대를 안아준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경계를 허물고 나의 연약한 부분을 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이에게 아픔과 쓰라림을 간직한 이들은 머뭇거리며 마지못해 안긴다. ‘안아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온기를 상대에게 전달해주기도 하고, 또 온기를 전달받기도 한다.
평소 애교도 많고, 내 말을 유독 잘 따랐던 운동부 학생이 있었다. 물론 매일 9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라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조는 날이 더 많았지만, 선생님에게 대들거나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날 아침 조회 시간에, 평소처럼 조회를 하는데 그 아이가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저녁 늦게까지 훈련을 하는 아이라 졸거나 잠을 자는 것 정도는 나도 크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현장체험학습 신청서를 그 아이만 안낸 터라 깨울 수밖에 없었다. 크게 이름을 불러가며 신청서를 내라고 재촉하는데, 아이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잠에만 취해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리며 깨우자 짜증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그러는 학생이 아니었기에 당황한 나는 일단 무슨 일이 있구나, 싶어 일보 후퇴했다. 교무실에 내려와 돌이켜보니, 나도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한테 그렇게 짜증을 부려도 되나? 그러던 애가 아닌데. 조회시간에 자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건데···’하며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나도 몸이 힘들거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친구와의 관계가 안 좋았을 때는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주변 사람들(특히 부모님)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니 또 그 아이와 대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름 화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웃으며 이야기해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간식도 준비해놓고 아이를 불렀다.
쉬는 시간에 담요를 두르고 내려온 그 아이는 전 시간보다는 짜증이 많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우선 준비한 간식 오예스부터 손에 쥐어주고, ‘오늘 많이 피곤하니’라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 조회시간에 선생님한테 보인 태도는 잘못된 거 알지?”
이야기하니 아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아는지, 더 이상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독 오늘 표정이 어둡고 힘들어보여 혹시 어디가 아픈 건지 물어보았다.
“사실 제가 만성적으로 호흡기 질환이 있어서, 오늘 좀 힘들었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는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숨쉬기가 힘들어 오늘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었다. 나는 한번도 숨쉬는 것이 힘들었던 적이 없어서,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짜증날지 온전히 알기 어렵다. 그렇기에 더욱이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해 그저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안되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아이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 학생이 보인 ‘행동’만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본다.
내가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잘못된 부분만을 짚어가며 따져묻기만 했다면 그 아이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 왜 오늘 하루가 힘들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봐주었기에 나는 아픈 그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아픈 몸상태를 물어봐주고 걱정해주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안아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힘들어보이는 내 옆의 소중한 이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봐주는 것. 그게 바로 ‘안아주기’의 시작이 아닐까.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고,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아이들의 슬픔과 미움까지 온전히 안아줄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