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2020년 4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창업동아리 모집 공고를 봤다. '뭐, 창업? 그게 뭔데?'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내 일상을 생각하니 뭔가 재미있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좋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연구실 친구들을 꾀어서 팀을 꾸렸고, 창업동아리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템을 정하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다들 아이디어는 쏟아지는데, 그중에서 대체 뭘 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결국, ‘내가 제일 원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난, 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엄청 많이 난다. 이게 또 엄청 스트레스였다. 어릴 때부터 염색을 계속해야 했는데, 진짜 웬만한 염색 제품은 다 써본 것 같다. 그런데 자주 염색하니 머리카락은 상하고 두피는 손상되고 시간과 돈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드는지...‘이건 좀 어떻게 해봐야겠다.’ 싶어서 염색 문제를 해결할 제품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염색 아이템으로 결정하고 계획서를 작성해서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내가 전공했던 유기물 반도체랑은 전혀 다른 분야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처음 해보는 주제라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다행히 서류 심사도 통과하고, 발표 평가도 합격해서 창업동아리 구성원으로 뽑혔다. 우리가 선택한 창업 아이템은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모발 손상을 줄이면서도 셀프 염색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기를 만드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창업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창업 지원금으로 최소 기능 제품(MVP)을 만들게 되었고, 사업성과 아이템을 검증하기 위해 여러 창업 경진대회에 나가보았다. 그 결과, 대상을 비롯해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여러 상을 받게 되면서 나의 자신감도 한층 높아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고, 내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창업동아리를 시작으로 지금도 헤어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창업 관련 에피소드 중에 처음 참여했던 ‘실전 창업 교육 프로그램’은 진짜 잊을 수 없다. 뭐랄까, 대학원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막 밀려왔다.
이 프로그램은 경쟁률이 엄청 높은 정부 지원사업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기대 없이 지원했다. 그런데 한 단계 한 단계 통과하면서 최종 단계까지 가게 된 거다. 매주 토요일 10주 동안 40시간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는데, 이게 또 쉽지 않았다. 우리 연구실은 주말에도 출근해서 실험을 해야 했다. 지도 교수님께 나의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내가 창업한다고 시간 쓰는 걸 탐탁지 않아 하셨다. 당연한 결과였고 이해한다. 그래서 들키지 않게 시간을 쪼개가며 연구와 창업을 병행해야 했는데, 이게 또 은근히 짜릿했다. 마치 금지된 걸 몰래 한다는 느낌이랄까? 그 반항심이 오히려 더 열심히 하게 만든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반항심과 열정이 뒤섞이면서, 점차 창업에서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정부 지원사업에 선정되고 창업 아이템과 관련된 특허도 내고, 아이템 확장성도 넓혀가면서 좋은 멘토들도 만나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도전은 나를 점점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항상 정해진 틀 안에서 생활했던 내가 이제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연구실 밖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지식 그 자체도 중요했지만,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과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아직 엄청난 성공을 이뤘다고 할 순 없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특히, 대학원생들이나 MZ세대에게 내가 겪은 경험을 나누고 싶다.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벗어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