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학년이 되고 서로의 반이 다른 층에 있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만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함께였다.
라임이가 보고 싶은 영화가 곧 개봉할 예정이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기에 관심이 있었고, 추리 수사물 장르는 무엇이든 찾아보던 라임이었다. 자신의 이런 마음이면 꾼도 당연히 좋아해 줄 거라는 확신에 꾼의 확정을 듣고 싶었다. 중간고사 끝나고 꾼과 함께 갈 생각에 수업을 마치자 얼른 꾼의 반 앞으로 갔다.
“라임, 오늘 너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라임이는 꾼의 말에 살짝 서운해졌다. 집으로 가면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에, 순간 이 상황이 너무 섭섭했다.
“조별로 조사해야 되는 게 있어서, 조원들하고 숙제해야 해. 미안해. 내일 봐, 라임”
갑자기 정해진 약속에 꾼은 라임이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꾼의 미안해하는 표정과 당연히 조원들과 함께 해야 하는 숙제였기에, 라임이는 억지로 괜찮다는 말을 겨우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여럿이 웃는 웃음 속에, 꾼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어제 못한 말을 하고 싶어 쉬는 시간에 꾼의 반으로 간 라임이는, 꾼이 자리에 없었기에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꾼의 목소리가 들렸고, 몇 명의 친구들과 올라오는 꾼의 모습에 라임이의 얼굴 표정이 조금은 굳고 있었다.
“라임”
라임이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꾼은 라임이를 반갑게 불렀고, 라임이는 전할 말을 입 안에 다시 가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꾼을 향해 웃었다. 라임이는 분명 어색했지만, 꾼은 세세하게 라임이의 감정을 살피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 갔다 와?”
당연히 꾼의 반이었지만, 라임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상했다.
“어, 지윤이네 반. 나중에 봐.”
거짓말을 전한 라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꾼의 반에 더 이상 가지 않을 거였다. 마쳐도 먼저 꾼을 기다리지 않을 거였다.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라임”
꾼이 뒷문 쪽에서 라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전의 서운함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라임이는 다시 웃었다.
수업시간에 있었던 웃겼던 이야기, 열변을 토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이던 국어 선생님의 모습, 점심시간에 나왔던 노래.. 함께 웃었고, 그 순간이 행복했다.
“중간고사 끝나는 날 우리 이 영화 보러 가자.”
라임이는 자연스럽게 어제 못했던 말을 전했다. 꾼의 자연스러운 대답을 기다리다, 더 자연스럽게 나온 꾼의 말에 라임이는 다시 실망하고 있었다.
“라임, 미안. 그날, 조별 숙제 했던 애들하고 떡볶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우리 그다음 날 가자. 괜찮지?”
괜찮지 않았지만, 라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아쉬워했다. 자신에게는 꾼이 아직도 크게 차지하고 있는 한 명의 친구였는데, 꾼에게는 많은 친구 중 한 명인 자신이 된 것 같아, 조금씩 심술이 나고 있었다.
***
“너 나랑 같이 가기로 했잖아.”
라임이는 오늘은 더 이상 꾼에게 서운함을 숨길 수 없었다.
중간고사 시험 후, 재량으로 갑자기 생긴 단체 견학이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멀리 나온 10대 소녀들은 다들 근처 대학가로 목적지를 정하고 있었다.
같이 집으로 가기로 했기에 라임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꾼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별 숙제 후, 너무도 잘 맞았던 꾼과 조원들은 그날도 몇 번의 의견 교환을 하며 서로의 시간을 맞췄고, 라임이가 신경 쓰였지만, 라임이도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에 미안함을 담은 웃음으로 꾼은 라임이에게 말했다.
라임이는 짜증을 내었고, 미안했지만 이런 것도 이해 못 해주는 라임이가 꾼도 짜증이 났다.
“미안해. 그런데 그렇게 됐어.”
꼭 너랑만 같이 가야 되는 것 아니잖아,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꾼은 우선 미안하다고 말했다.
“갈게.”
꾼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버스에 오른 라임이었다. 꾼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못 본 척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반짝이는 햇살에 눈을 못 뜨던 라임이는, 파란 하늘 예쁘게 얹어진 구름에 눈물이 났다. 꾼이 미웠다.
살짝 어색해진 라임이와 꾼이었다. 화가 난 게 아닌 듯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버스 안 감정을 극복 못한 라임이는 꾼과의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 짧아졌고, 대화가 끊기는 횟수와 간격이 늘었고, 어느 순간 그러고 있는 서로의 모습에 말투도 점점 무뚝뚝해지고 있었다.
꾼은 라임이가 아직도 제일 좋은 친구였지만, 같은 반 친구들과도 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라임이가 이해 못 해준 사실이 서운했다. 그날의 상황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임이의 예전과 다른 조금 어색한 모습에 망설이고 있었다.
“잘 가.”
“어. 너도.”
헤어지는 순간의 아쉬움은 여전했지만, 상처받은 소녀들은 마음을 제대로 표현 못하고 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
꾼은 라임이네 반으로 갔다. 이미 마쳐 복도에 서 있는 라임이었다.
“꾼, 왔어?”
지윤이가 라임이 대신 말했다. 꾼은 라임이를 힐끗 보고는 지윤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 라임이네 집에 가기로 해서. 가자.”
꾼은 순간 서운해서 울고 싶었다. 늘 마치면 서로의 반으로 갔던 라임이와 꾼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말도 안 해주고 지윤이랑 약속을 잡은 게 기분이 나빴다.
집으로 가는 길, 꾼은 이상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라임이와 지윤이는 꾼이 모르는 친구 이야기를 하며 크게 웃고 있었고, 그런 꾼을 챙기지 않았다. 어느 순간 꾼의 존재를 깨달은 지윤이는 꾼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대화 속 친구를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 내가 엄마 심부름을 가야 해서. 먼저 가.”
꾼은 라임이와 지윤이가 물을 새도 없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윤이의 잘 가라는 말에 살짝 뒤돌아본 꾼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라임이를 볼 수 있었다. 라임이가 미웠다. 심부름은 당연히 없었고, 둘만 즐거운 그런 모습을, 꾼에게 잘 가라는 말을 하며 함께 갈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싫었다.
꾼과 라임이는 더 이상 같이 집으로 가지 않았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기다리지 않았다.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서로를 향했던 마음은, 서로를 오해하게 만들었고, 서로를 멀어지게 했다.
우연히 마주칠 순간은 멀리서도 알아본 서로를 고개 돌린 채 못 본 척 지나가게 했고, 약간은 과장되고, 많이 어색했고, 그럼에도 매 순간 후회하게 했다. 그렇게 꾼과 라임이는 서로를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