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예술
물 한잔의 본질은 물인가, 물 잔인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릇은 그릇일 뿐, 본질은 그릇 속에 든 내용물인 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물은 그릇에 따라 그 본질을 바꾸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그란 항아리에 담긴 물은 동그란 항아리 모양으로, 메스실린더에 담긴 물은 원기둥 모양으로, 삼각 플라스크에 담긴 물, 와인 디켄터에 담긴 물은 모두 그 그릇의 모양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꾼다.
모양은 겉모습일 뿐,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세관에 담긴 물은 어떠한가, 중력에 따라 그릇(모세관)의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물이 오히려 하늘로 솟아오른다.
계영배의 물은 적절한 수위를 넘지 못하고 아래로 쏟아진다.
또한, 물뿌리개에 담긴 물은 식물에게 수분을 공급하는 생명의 물이고, 물총에 담긴 물은 아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제공하는 친구이며, 물대포의 물은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강력한 살인자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본질이라 생각했던 내용물은 그 껍질에 의해 본질이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껍질 또한 본질인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이 우리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식탁 위에 놓인 한잔의 물 또한 만만치 않은 철학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보기 나름이다.
실리콘밸리의 구글 캠퍼스 야외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로 무릎을 꿇고 명상하는 여성의 모습을 한 “Quantum Meditation II”라는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Julian Voss-Andreae라는 독일 조각가의 작품으로, 양자역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측면에서 보면 여성의 모습이 선명하기 보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갑자기 작품이 투명망토를 둘러쓴 듯 시야에서 사라지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철판을 얇게 조각하여 얇은 면이 정면을 보도록 이어 붙여 놓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아래 사진 참고>
보기 나름인 작품인 것이다. 어쩌면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인 관찰한 순간 붕괴하며 입자의 위치가 정해진다는 개념을 작품에 녹여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가 철학을 가지고 예술을 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이해하기 난해한 현대미술보다 양자역학자가 만들어낸 보기 나름의 작품에 묘한 친근감과 감동을 느낀다. 과학으로 예술하기, 본질은 예술인가, 과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