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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退職)은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과 같은 것!!!

by 개미와 베짱이 Mar 04. 2025

퇴직은 모든 것을 바꾸는 기폭제

퇴직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일상이 송두리째 달라진다는 말이 맞다. 어제와 같은 것은 해가 뜨고 지는 자연현상뿐이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 했던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퇴직은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명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매직(magic)과도 같다. 오십이 넘은 남자에게는 치명적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 없어졌기에 더욱 혼란스럽다. 지금까지는 조직에 기대었다. 조직의 크기와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명함에 새겨진 조직과 직책의 후광(後光) 덕을 본 것이 사실이다. 그 후광은 퇴직과 동시에 소멸된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멘붕이 되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부아는 만병의 근원이다. 내려놓아야 한다.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조직의 후광은 잊고 자체 발광(發光) 해야 한다. 반딧불처럼 말이다.      


퇴직과 변화

명함이 사라진다는 것은 고용계약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약관계 종료와 동시에 여러 가지가 바뀐다. 싫든 좋든 매일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나갔던 회사는 더 이상 내가 발 디딜 곳이 없다. 집이 사무실이자 휴게공간으로 바뀌었다. 회사에서 거실 소파로 공간 이동한다. 거실 한 복판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소파 곁에 서성이는 가장의 모습은 가족에게는 생경하다. 특히 아내에게는 정말 성가신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전업주부이던 사회활동하는 여성이건 거실은 여자의 공간이다. 자신이 늘 오가는 길목 한가운데에 주말에만 보이던 남자가 오늘도 내일도 계속 머물고 있으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머물 곳을 찾아야만 한다. 나 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타임 푸어(time poor)에서 타임 리치(time rich)

시간은 또 어떠한가? ‘타임 푸어(time poor)’에서 ‘타임 리치(time rich)’가 되는 순간이 퇴직이다. 그래도 뭔가 하나 풍부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남고 넘치는 것이 시간(時間)이다. 시간 보내는 것이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 퇴직 이후의 삶이다. 파고다공원으로 출근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마뜩하게 갈 곳도 없다.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했던 것 중에 잘할 수 있는 것 또는 좋아하는 것이면 강추다. 다만, 사회적 호환성이 곁들여져야 생명력이 길어진다. 사회와 단절된다고 나쁠 것은 없지만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혼자 즐겨야 한다.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와 연결된 뭔가에 이끌릴 때 가치와 보람이 커진다.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도 함께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 일 텐데 말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될 수 있는 레트로(retro)도 괜찮다. 하여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건강함과 풍요로움을 느끼며 쓰임새 있는 노년으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     


금전적으로는 ‘마르지 않는 샘에서 곳간

퇴직하면 가장 걱정하는 것이 금전적 여유이다. 지금까지는 ‘마르지 않는 샘’ 덕분에 잘 지내왔다. 가뭄이 들어도 샘은 마르지 않았기에 궁핍함을 느끼지 못했다. 샘물은 퇴직과 동시에 말라 버린다. 그동안 통장의 잔고가 쌓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퇴직과 동시에 재미가 갑자기 불안감으로 돌변한다. ‘마르지 않는 샘’이 ‘곳간’을 허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곳간에 채워진 것이 풍족하다면 불행함과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이제는 쌓아 두었던 ‘곳간’의 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나라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시점이 50.5세인 점을 고려할 때 국민연금 수급 시기(65세 기준)까지는 약 15여 년이 남아 있다.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곳간’이라면 한숨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대부분 집 한 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십 넘으면 종전 월급 수준을 잊어야 한다. 육십 세 이상 경제활동 고령자 약 3/4 정도가 최저임금 수준이라는 통계청의 발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된 일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일을 찾을 때 기준은 젊은이들과 달라져야 한다. 청년들은 연봉과 복지 수준, 워라밸 등과 같은 일과 일상이 병행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을 따지겠지만, 오십이 넘으면 ‘할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경제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관계는 동료에서 가족으로

퇴직은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어제까지는 가족보다 동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퇴직은 이것을 단숨에 뒤집는다. 관계는 직장 동료에서 가족으로 대폭 축소된다. 수 십 년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동료들이었기에, 퇴직 이후에도 만남이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남이다. 원래부터 남이었다. 피를 나눈 혈연적 관계인 형제도 아니다. 함께 동문수학(同門修學)한 학연적 관계도 아니다. 명함을 주고받았던 비즈니스 관계이거나, 비즈니스 성공을 위해 협업 관계에 있었던 직장 동료였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큰 기대는 더 큰 실망감을 안겨 줄 뿐이다. 그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만병통치약이다. 가족도 자신이 알고 있던 수준이 아니다. 실망할 필요가 없다. 자신도 나이가 들어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 났다. 자녀들도 성장했다.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다. 성인으로 잘 성장했다. 충분히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인격체로서 손색이 없다. 부모 품을 벗어나려고 발 버둥이는 자녀들을 기분 좋게 놓아줘야 한다. 어린 시절의 자녀 모습에 머물러 있는 상상 속의 자녀 모습을 지워야 한다. 배우자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자도 주된 일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나 혼자만 가족을 위해서 애쓴 것이 아니다.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기에 오늘날 탄탄한 가족이라는 형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가족에게 뭔가 기대를 한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더욱 튼튼할 수 있도록 각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또 다른 가족을 위한 배려요 책임감이다. 그래야 가족 상호 관계가 원만하고 오래간다.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은퇴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 그리고 관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꾀한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 결과 자존감이 허물어지기가 쉽다. 퇴직은 명함에 새겨진 직장과 직책이 사라지면서 후광(後光)도 함께 빛이 소멸된다. 이제는 스스로 자체 발광(發光)하는 반딧불이 되어야 한다. 자존감이 높은 반딧불일수록 빛이 더욱 영롱하다. 정해인의 ‘나는 반딧불’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성공의 기준을 낮추고 세상을 바라보니

     비록 작지만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    략)     

     나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참 어려웠는데..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그래도 괜찮아 나는 눈부시니까     


낮은 자존감은 스스로 가족과 격리시킬 뿐 아니라, 사회와 높은 벽을 쌓으며 은둔자로 밀어낸다.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남은 지금까지 생활 패턴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늦잠을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남들 출근할 시간에 여유 있게 일어나서 커피 한잔을 즐기는 오전을 상상한다. 웬일일까? 퇴직하면 눈이 더 먼저 떠진다. 더 자라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청개구리 심보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새벽잠이 없는 것일까? 일어나도 마뜩하게 할 일이 없다 보니 갈 곳이 없다. 갈 곳이 없기에 만날 사람도 없다. 내 일(job)이 없다는 것은 무엇(what), 장소(where), 사람(who)이 없다는 의미이다. ‘내 일(job)’을 만들어 자체 발광해 보자. 반딧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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