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가볍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없이 평화롭게 들린다.
어느새 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다.
경쾌한 리듬을 타며 쏟아지는 빗소리에, 조금 더 자고 싶은 유혹을 가뿐히 밀어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가만가만 대지를 적시고 있다.
창문 너머, 연둣빛 이파리를 새로 달기 시작한 단풍나무들은 미동도 없이 빗줄기를 맞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저 나무들처럼 푸르던 젊은 시절부터 꿈꾸어 온 시간을 살고 있다.
빗속을 뚫고 달려갈 출근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이 새벽이 고맙고도 귀하다.
남편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옷을 챙겨 입는다. 현관문을 열자 촉촉한 습기가 얼굴을 스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가 쉽게 그칠 기미는 없어 보인다. 우산을 나란히 펼쳐 들고 천천히 봄비 속으로 향한다.
정원 곳곳에 심은 수선화는 누구보다 먼저 샛노란 꽃송이를 열어 봄을 알리고 있다.
거친 자갈돌 위로 몇 송이 꽃을 선보였던 크로커스는 이미 스러지고, 보랏빛 히아신스가 차례를 이어받아 향기로 아침을 열고 있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도 봄은 매일 달라진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정원을 돌아보기만 하자고 이야기했지만, 역시 오늘 아침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우산을 받쳐 든 채 우리는 어느새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자갈길에 뿌리내린 꽃모종을 옮겨 심는다. 자연과 함께하는 이른 아침은 우리에게 늘 설레는 시간이다.
계절이 지나는 기미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분주하게 달리던 시간에서 벗어난 지금,
억지로 해야 할 일이 없는 이 시간은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여백의 시간이다.
나는 자연과 함께하는 건강한 노동과 느긋한 시간들 속에서 오래도록 서로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귀촌 3년 차에 들어선 올봄은 유난히 할 일이 많다. 요즘은 지난겨울처럼 책을 붙들고 앉아 있을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풀을 뽑고 돌을 고르는 일이 잦아지면서 손은 더 거칠어졌다. 잠시 일을 멈추고 손을 들여다본다.
시퍼렇고 굵은 힘줄이 도드라진 손등, 풀물과 흙이 낀 손톱. 사실 곱다고 말해 줄 수는 없는 손이다.
며칠 전, 화실에서의 일이다.
“어머, 선생님 손톱이 우렁이 손톱이네요?”
한참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같이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회원 한 분이 내 손을 들여다보며 말을 건넸다.
“아, 맞아요. 우렁이 손톱…”
별말이 아닌데도 순간 움찔하며 손을 감추고 싶어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손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왼손은 친가 쪽 유전자를, 오른손은 외가의 우렁이 손톱을 물려받은 짝짝이 손이었다.
짧은 손가락에 넓적한 손톱은 늘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 같은 것이었다. 누가 보는 앞에서 손을 내미는 일이 영 싫고 어색했다.
그래서였을까. 하얗고 섬세하게 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 손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계는 왠지 더 여유롭고, 더 세련되어 나와는 다른 결을 가진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종종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닮았다고 말한다. 사실 남편과 나는 외모로 보면 그다지 닮지 않았다. 아마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환경에서 오래 살다 보니 생긴 닮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손만큼은 참 많이 닮았다. 남편의 손 역시 거칠고 투박하다.
시골살이를 시작하며 흙을 만지는 날이 많아지면서 손톱 밑에는 늘 풀물과 흙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 가서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한다.
입으로는 '일하는 손이 아름답고 귀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솔직히 나는 여전히 못생긴 내 손이 부끄러을 때가 많다. 곱고 매끈한 것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세상 속에서, 잘못한 것 하나 없는 내 손이 그저 거칠다는 이유로 숨기고 싶어진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일을 해낸 내 손에게 미안해진다. 이 손으로 아이를 키우고, 사람을 가르치고, 집안을 돌보고, 글을 썼다.
지금도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으며 쉼 없이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늘에서야 이 손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한다.
일을 마치고 들어와 오랜만에 손톱을 정성껏 다듬는다. 여전히 투박하고 거칠지만, 정말 나다운 손이다.
니의 두 손 안에는 그동안의 시간을 건너온 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어진 모양이 아니라, 견디고 살아낸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이 우렁이 손톱을 가진 두 손으로 내 인생의 또 다른 봄날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