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들고 정원에 서다

프롤로그

by 연필 든 정원사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가 늘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학교의 시간표에 맞추어 움직이던 날들이었고, 해야 할 일들은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년이라는 문턱을 조용히 지나왔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일터에서 벗어난 시간은, 예상과 달리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쓸모를 다한 무엇이 사회적 필요에서 밀려난 것 같은 기분에 비감해하기도 했고,

갑자기 속도가 느려진 삶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디론가 서둘러 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은 남아 있는데,

정작 급히 도착해야 할 곳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이 허전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조금씩 다른 리듬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정원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고,

계절의 기미를 먼저 알아차리는 풀잎들을 들여다보고,

잘 자라고 있는지, 혹은 조용히 버티고 있는지

말없이 서 있는 것들의 안부를 살피는 일.

그런 날들을 보내다 보니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삶은 반드시 앞으로만 달려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제자리에서 익어가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거창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신 쉽게 지나쳐 버리기 쉬운 작고 사소한 순간들—

남편과 마주 앉아 나누는 아침의 온기,

정원 한편에서 묵묵히 버티는 작은 풀 한 포기,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문득 마음이 흔들리던 순간들을

조용히 붙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언제든 휘발되어 달아나 버리는 순간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내 삶의 서랍에 담아두고 싶은 갈증,

그래서 연필을 들었습니다.


이 연재에는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이야기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빠르게 달려온 시간을 지나

이제는 하루의 속도를 조금 늦추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기록이

천천히 이어질 예정입니다.


혹시 지금,

너무 오래 애쓰며 살아왔다고 느끼는 분,

속도를 줄이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망설이는 분,

혹은 인생의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정원의 이야기가

그분들의 걸음을 잠시 늦추어 주는 작은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토록 차갑고 냉정하던 햇살이

어느새 노릇해진 것을 보니

봄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나는 오늘도

간절히 봄을 기다리고 있는 정원을 둘러보고,

제 마음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한 줄의 문장을

천천히 적어 내려갑니다.

아직은,


나도 익어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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