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간과 만난 여행

제주 비자림 숲에서

by 연필 든 정원사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처럼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시간은 무덤덤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새롭고 낯선 거리와 사람들, 생경한 풍경이 주는 그 낯섦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안긴다. 여행지를 정하고 일정을 짜며 짐을 꾸리는 시간들은 여우의 말처럼 그 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풀어보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지난여름의 끝자락, 나는 6개월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기간제 교사로 다시 학교라는 사회에 돌아갔었다. 퇴직 후 비교적 느긋하게 흘러가던 일상과 달리, 다시 맞이한 출퇴근의 리듬은 약간의 고단함을 동반했지만 생각지 못한 활력을 얻는 뜻밖의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성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보람이 덤으로 주어졌고, 자유분방했던 하루의 흐름이 한결 단정해졌다. 달력의 빨간 숫자가 다시 소중해졌고, 주말이 주는 해방감을 온전히 누리는 기쁨도 되찾았다.


그러나 약속된 여섯 달을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기 전까지의 시간은, 솔직히 말해 잠시 유보된 자유를 향해 마음이 기울던 시간이기도 했다. 방학이 시작되자 미루어 두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고, 그중 하나가 해마다 이 계절에 떠나는 남편과의 제주 여행이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하며 여행 가방을 챙기는 시간은, 기다림이 만들어 내는 행복을 온전히 누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새벽의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공항은 우리 부부처럼 어딘가로 떠나는 이들의 명랑한 발걸음으로 가득했다. 활주로에 들어선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속도를 내며 묵직한 굉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땅을 딛고 있던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마침내 비상이 시작되었다.

비행기가 가볍게 날아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떠나온 도시는 미니어처처럼 작아졌다. 시선이 높아질수록 아옹다옹하던 일상이 그 순간만큼은 너그러워지고 사소해진다. 하늘로 붕 떠오르던 찰나의 간질간질한 감각은, 그동안 쌓였던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보상받는 느낌처럼 다가왔다.


한 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제주공항에 내렸다. 꼭두새벽을 깨우며 이른 비행을 택한 덕분에, 우리는 제주에서 아침을 맞았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지만, 육지와는 다른 제주 특유의 온기가 은근히 스며 있었다. 예약해 둔 렌터카에 짐을 싣고 2박 3일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망설임 없이 제주 동쪽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섬을 한 바퀴 도는 코스를 택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푸른 바다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줄곧 우리와 동행했다. 해안을 따라 늘어선 하얀 풍차의 날개조차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질 만큼 풍경은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아침 식사를 위해 함덕 인근의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면 어떠랴. 눈에 들어오는 소박한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한 뒤, 김녕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들렀다. 성수기가 아니라서인지 카페 안은 한적했고, 몇몇 여행자들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늦은 아침 식사로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그곳의 시그니처 메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한라산의 모양과 빛깔을 닮은 쑥 파운드케이크와 음료를 주문하고 통유리로 둘러싸인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예쁘게 세팅된 음료와 케이크를 앞에 두고, 남편과 나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할 곳 없는 인증 사진’을 남기며 어설프게 젊은 감성을 흉내 내 보았다. 잠시나마 우리 딸아이들처럼 젊은 날의 감각이 반짝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음료를 마시며 말없이 제주의 푸른 바다를 눈에 담았다. 여행이란 어쩌면 굳이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눈길 가는 대로 생각이 흘러가도록 허락받은 순간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남편도 이런 마음을 읽었는지, 알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로 통유리창 너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페를 나와 다음 목적지인 비자림으로 향했다. 해안도로를 벗어나 제주 안쪽으로 얼마간 달려가자 숲을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주차장이 나타났다. 입장권을 끊고 안내판 앞에 서서 비자림에 대한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이곳은 수령 500~800년에 이르는 비자나무 약 2,800그루가 밀집한, 세계적으로도 드문 단일 수종 숲이라고 했다.


화산송이가 깔린 길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섰다. 발밑의 작은 자갈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제주 화산 활동의 흔적을 품은 구멍 많은 화산암 조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숲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길과 어우러진 그 돌들이, 제주의 땅과 숲이 품은 시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푸른 바다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 없는 느린 걸음으로 오래된 숲에 시선을 두며 숨 가쁘게 살아오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우리 부부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은퇴자의 자리에 멈추어 서서 오늘 같이 천천히 우리의 시간을 누릴 수 있음에, 비자림 숲이 더 포근하게 다가왔다.


나무 데크가 놓인 더 깊은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은 거목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혼자서는 서기 힘든 삐뚜름하고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서로 기대어 햇살을 나누고 있었고, 울퉁불퉁한 돌 틈 사이로 드러난 뿌리들은 오랜 시간을 견뎌 온 흔적처럼 보였다. 그 뿌리 하나하나가 지난 세월의 고단함과 버텨 낸 시간의 수고를 말해 주는 듯했다.


마침내 지난 2000년, 새천년의 시작을 기념하며 이름 붙여진 ‘새천년 비자나무’ 앞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나이테를 숨기고 있을지 짐작조차 어려울 만큼 우람한 둘레를 가진 나무의 수령을 가늠하며, 이 나무가 지켜 낸 시간들과 그 아래를 오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떠올려 보았다. 고작 백 년 남짓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마음이 닿는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나무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우리 부부는 셀프 기념사진 한 장을 찍으며, 영겁의 시간 속에 한 점으로 남을 찰나의 순간을 새겼다. 그리고 다시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오늘 하루의 여정이 끝나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한층 더 많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은 낯선 풍경과 감정이 겹겹이 쌓이며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어느 여행 작가의 말이, 그제야 몸으로 와닿았다.


....... 여행은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다, 종착지는 변화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다시 떠올린다. 어쩌면 여행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선생님의 글처럼 언제나, 조금은 변화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났던 비자림 숲에서 나는 무엇을 만났고 어떤 의미를 건져내었을까.


봄을 기대하는 시간, 어느새 햇살이 창밖에서 기웃거린다. 계절은 이렇게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고 있나 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끝에서, 나도 아주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내 앞에 놓인 시간이, 전보다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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