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의 메모
존댓말이 없는 언어권의 나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호주에서 일을 한 지는 고작 한 달 반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은 이런 조직문화가 보편화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거다.(물론 한국의 몇몇 기업에서는 수평적 조직문화 형성을 위해 직급이나 00님, 00 씨 대신 영어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고 그런 시도들을 긍정적인 신호로 생각한다.) 뭐 한 100년 뒤라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언어에 존댓말이 존재하는 한, 이런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실현되기 매우 힘들 것 같다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한국에서는 누군가와 일을 함께 할 때 이름 다음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마 나이일 것이다.(그다음은 아마 MBTI?)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만으로 23살이시면 한국 나이로는 25살이신 거네요?' '저보다 언니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동갑이니까 말 놓을게.' 따위의 말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은연중에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게 만든 걸 지도 모른다. 호주 카페에서 한 달을 일하면서 나는 며칠 전에야 비로소 매니저의 나이를 알게 됐고, 매니저보다 더 친한 사이인 주방 직원의 나이는 아직도 모른다. 그저 내가 막내라는 것만 안다. 매니저가 알려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전에 어디선가 호주에서 워홀 이력서를 작성할 때 나이는 입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나는 내 나이를 이력서에 적지 않았고, 인터뷰를 갔을 때 고용주 중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나이를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물론 이건 오지(aussie) 잡 한정이라고도 생각이 드는 게, 여기서 지원했던 한인잡이나 한인잡의 구인 공고를 보면 이력서에 나이와 성별을 적어서 보내달라는 고용주가 100이었다. 트라이얼이나 인터뷰 자리에서도 한국인 고용주들은 나의 나이를 꼭 물어봤다.
나는 매일 롱 마끼아또를 사러 오시는 할아버지 손님에게도, 핫초콜릿을 주문하는 중학생 손님의 주문을 받을 때에도 나는 똑같은 'you'를 쓴다. "How are you?" "What can I get for you?" 'you'가 '너'가 아닌 존칭 '당신'이라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영어시간에 배워서 익히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나에게 'you'는 '당신'보다는 '너'의 느낌이 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상대방을 나이에 상관없이 'you'라고 지칭하며 얘기를 이어나가는 소통 방식의 장점은 많다. 심지어 때로는 상대와 내가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근무 초창기에 중년 남성의 손님과 스몰톡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껴서 적극적으로 말을 걸지 않았는데, 옆에서 매니저가 '너 손님들이랑 얘기하는 게 두려워? 저 손님은 너랑 대화하고 싶어 하는데 네가 피하고 있잖아.'라고 한소리를 했다. 그 이후로는 나이에 상관없이 일관성 있는 태도로 손님을 대하고 있다.)
존댓말 부재의 편리함은 근무 환경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도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주야장천 말한 내용과 같은 원리이다. 며칠 전을 포함해 나는 호주에서 세 번의 밋업(친구를 사귈 수 있는 모임을 소개해주는 어플)에 참석했다. 첫 만남에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보다는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지, 시티에 맛있는 커피집이 있는지를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나는 밋업에서 친해진 사람들의 나이를 모른다. 관심사가 하나라도 겹치면 바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이를 알 필요도 없고, 상대방이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친구 만들기란 얼마나 쉬운가. 멜버른에 와서 알게 된 친구 D가 말하길, 본인이 브리즈번에 있을 땐 버스 기사, 지나가다 우연히 본 공사장의 현장 직원, 심지어는 화장실 줄을 같이 기다리는 사람과도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호주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납득 가능한 일화일 것이다. 멜버른에도 길거리의 홈리스들에게 친숙하게 말을 걸며 안부를 물어보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으므로.(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에는 선셋을 보러 혼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교통카드 사용법을 알려달라고 말을 걸어와서 마이키 어플을 까는 것부터 로그인과 탑업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퀸즐랜드주에 사는 태국 출신 N은 휴가를 맞아 한 달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 중이라고 했으며, 도움을 줘서 매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우리는 인스타를 교환했고 그렇게 친구가 됐다.) 아무튼 나는 내가 나이와 존댓말을 신경 쓰지 않는 환경에서 자유와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평적인 관계에 놓일 때 우리는 서로를 더욱 존중하며 서로 연대하게 된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 당연한 얘기다. 이론으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을 적용시켜 실제로 영어권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느끼는 문법의 깊이감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론을 직접 응용하는 순간 우리는 언어와 문법만을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발 담그고 있는 나라의 문화,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가치관,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고정관념, 모국이 가르쳐왔던 이데올로기, 그 사이에서의 간극, 이 모든 것들을 몸소 깨닫고 성찰하며(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문화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방금 내가 한 말의 이론과 실제도 느낌이 다를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익숙한' 세계를 깨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누군가는 어린 직원이 나이가 많은 직원에게 잘못된 일처리 방식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사람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본인이 편안함을 느끼는 환경(그게 어떤 것이 되었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내가 한국에 돌아가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한국의 조직문화를 따라야겠지. 조금 절망적이다. 또 모르지. 어떻게든 숨 막히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려나. 아무튼 적어도 호주에 있을 때만큼은 호주의 방식을 마음껏 즐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