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계곡으로 나서면서 나는 성스러움을 예상했었다.
성스런 계곡으로 나서다.
성계투어라고 한다.
잉카제국의 옛 수도인 쿠스코 주변 유적지에 대한 답사이다. 우리는 줄이기 좋아한다. '성스런 계곡 투어'를 줄여서 '성계투어'라고 한다.
쿠스코. 제국의 수도이다. 권력의 심장이다.
권모와 술수. 기만과 위장 그리고 암투와 배신이 있는 세속적인 공간이다.
그 쿠스코 옆에 있는 성스런 계곡은 어떤 곳일지 궁금하다.
음과 양이다. 세속과 성스러움은 공존한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상처 입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인근의 성스런 곳에서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다. 성스러운 장소가 옛 도성 인근에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성계는 성스런 곳이어서 나도 거기에 가면 고대 잉카인들 처럼 세속에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나의 이런 추측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무식과 무지의 소치임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런 꿈을 안고, 그 성스러운 계곡의 품으로 퐁당 뛰어들었다.
친체로 Chinchero
성스러운 계곡의 예고편이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쿠를 떠나서 성스러운 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키가 작은 풀들로 덮인 넓은 광장이 있다.
계곡은 계단식 논이 빽빽하다.
해발 3,700미터이지만 하늘을 맑고 바람은 신선하다.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 남미의 냄새가 난다. 여기가 남미 안데스이구나 실감하게 된다.
돌담을 따라 옛 거리를 걷노라면,
화려한 직조물들을 내놓고 파는 인디오 원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모라이 Moray
지금으로 치면 농업개발원 또는 농업연구소로 보아도 무방하다.
여기에 원형으로 계단식 시범포를 만들고, 농작물의 품질을 개량했던 곳이라고 한다.
모라이는 참 다복한 곳에 만들어졌다.
주변은 평지이고 벌판엔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해 있다.
이렇게 야생식물이 잘 자라는 땅에는 어떤 작물을 심어도 풍작일 것이다.
페루의 옥수수는 대박이다. 알도 굵고 맛이 있다.
이런 우수 품종의 농작물들이 여기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살리네라스 Salineras de Maras
염전이다. 지하수가 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염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땅에서 흘러 나오는 지하수로 소금을 만든다.
왕이 직접 관리했다고 한다
이 높은 지역에 잉카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이 준 두개의 선물 때문이다.
하나는 우루밤바강이고, 또 하나는 살리네라스 염전이다.
물과 소금은 생명의 원천이다.
염전은 규모가 크다.
그리고 계단식이다. 염분이 있는 지하수를 안데스 태양에 말렸으니 소금의 품질은 불문가지이다.
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
잉카군대가 스페인군대와 싸워 이긴 적도 있었다. 그곳이 여기 오얀따이땀보이다. 승리의 기억이다.
마을은 아늑하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타임머신을 탄 것 같다. 여긴 그냥 잉카이다.
페루의 거의 모든 마을들은 스페인식이다. 스페인식 도시계획이고 스페인식 건축이다.
그런데
여기 마을은 잉카 그대로이다. 건축물도 그대로이다. 산에 만든 계단식 밭들도 역시 그대로이다.
사람도 그대로이다.
여기가 성스런 계곡의 끝이다.
그리고 마추픽추를 떠난 잉카레일의 종착역이다.
성스런 계곡에 성스러움은 없다.
성스러운 계곡으로 떠날 때 나는 성스러움을 생각했다.
성스러움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점검했다.
혹시 그 성스러움은 나에게 어떤 예의, 예를 들자면 복장이라든가. 신발 등등에 있어서 어떤 제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성스런 계곡을 나오면서 나는 그 성스런 계곡에서 그 어떤 성스러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성스런 계곡이 Holly Valley가 아니라 Scared Valley임을 발견했다.
소금이 없으면 사람은 살지 못한다. 그 소금을 지천으로 생산해 내고, 비탈에 계단을 만들어 밭을 일구고, 벌판엔 아름다운 풀들이 자라고. 그 풀밭엔 라마가 뛰어놀고, 그 라마의 털로 옷을 만들고, 적들이 쳐들어 오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더 좋은 농작물을 위해 연구하고.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그것은 일상이다.
그 일상이 어쩌면 성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성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은 신성한 것이다. 그 일상이 곁에 있을때는 고마움믈 모른다. 그러나 그 일상이 깨지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것인지 알게 된다.
성스런 계곡엔 그 일상이 있다.
그것이 성스러운 것임을. 선성한 것임을. 목숨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것임을 잉카인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늙은 나그네는. 성스런 계곡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지역을 여행했구나.
11 Feb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