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은 랜덤박스 같다.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내 의지와 무관하다.

by B CHOI
Chimborazo. Ecuador. 0811013c.jpg
Rio bamba. Ecuador. 1004018.jpg



비행기 출발시간.

나는 남미를 한 달 남짓 여행하면서 비행기를 14번 탔다.

남미에서는 그렇다. 공항에 가는 건 내 마음이지만, 비행기를 타는 건 지네들 마음이다.


공항에서 18시간을 대기한 적도 있다.

비행기 취소는 물론이고, 예정시간보다 먼저 출발하기도 한다.


남미의 비행기 연착 취소는 일상이다.

승객들도 서 너 시간 지연되는 건 화를 내지도 않는다.




마추픽추에 비가 내린다.

세상에 못 믿을 건 일기예보이다.

세계 공통이다.

분명 인터넷에는 해님이 웃고 있었는데, 창 밖엔 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 여행자는 애가 탄다.


마추픽추의 밤이 그랬다.

오얀따이땀보를 출발할 때 날이 흐리더니 마추픽추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굵어졌다.

나는 일정이 여기에 하루를 더 머물지 못한다. 내일 오전에 마추픽추에 오르고, 오후에 쿠스코로 돌아가야 한다. 기차며 호텔이며 비행기며 다 예약이 되어있다.

그런데 비가 온다.


창문을 열고 송창식 님의 '비의 나그네'를 부르다.

님이 가시나 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노래 가사가 아니다. 주문처럼 반복한다. 밤비 그치는 소리. 밤비가 그치고 밤비처럼 님이 떠나가도 좋다.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빨간 배와 파란 배

파타고니아 남미의 남쪽 끝자락에 우수아이아 땅끝 마을이 있다.

펭귄섬에 가려면 거기에서 배를 타야 한다.


배를 탔다.

호텔에서 안내해 준 배다. 내 배는 파란색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빨간 배가 앞서 간다.

빨간 배는 내가 탄 파란 배 보다 작다.

작은 배의 장점은 큰 배보다 빠르다. 단점은 큰 배보다 시설이 빈약하다.


그 빨간 배는 늘 내가 탄 파란 배 보다 일찍 도착하다. 펭귄섬도 그렇고, 마지막 등대도 그렇다.

그래서 좋은 자리를 먼저 잡는다.

떠나는 것도 우리보다 늦게 떠난다.

그러나 다음 목적지에 가면 먼저 와 있다.





내 여행의 랜덤박스들

비행기가 지연되는 것도. 내가 파란 배를 탄 것도 그리고 비가 내리는 것도 내 잘 못이 아니다.

나의 노력과 능력과 인격과 희망과 전혀 관련이 없다.


내가 나쁜 택시 기사를 만나는 것이나. 핸드폰 날치기를 당하거나, 배탈이 난다거나 하는 것들 역시 여행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지만

역시 나의 실수나 잘못만은 아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챙겨도 공항에 도착했는데

호텔 금고에 여권을 두고 온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나의 여행은 본질적으로 나의 노력과 능력이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는 다른 요인들에 의하여 여행의 품질이 결정된다.



여행자는 주머니에 랜덤박스가 있다. 무수히 많은 랜덤박스가 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선물 상자들이다.

그리고 매 순간 그 랜덤박스를 하나씩 꺼내 열어 본다.

그 랜덤박스 안에.

항공기 지연. 나쁜 택시기사. 비. 천둥 번개. 도둑. 식중독. 몸살 그런 것들이 들어 있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 랜덤박스는 심리적 존재가 아니다. 실체적 존재이다. 실존하면서 나를 지배한다.






서울의 집과 인디오들의 집

서울의 건축물은 기본적으로 냉난방 개념이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야 한다.

공동주택이라면 이 냉난방은 기본적으로 지원이 된다.


남미 안데스산맥 골짜기에 사는 인디오 원주민들에게 건축물이란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것이다.

거긴 춥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다. 가까운 곳에서 만년설이 녹고 있다.

그런데 집은 난방이 없다.


자연이다.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벽과 문으로 구분을 할 뿐 근본적으로 집도 자연이다.

그래서 실내 바닥은 흙이다. 맨 땅에서 잠을 잔다. 자연의 품이다.



내가 여기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듯이

내가 서울이 태어난 것 역시 나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다.

내가 잘나서 서울에 태어나고, 이 분들이 못나서 안데스에 태어난거 아니다.


내가 만일 여기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맨바닥에서 잠을 자고, 수도와 전기는 구경도 못하고. 태양과 바람과 큰 새 독수리를 친구 삼아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늙은이가 혼자 남미를 한 달 정도 여행 하다 보면 스스로 철학자가 된다.

그 랜덤박스는 운명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의 운명. 사랑해야 할. 안고 비비고 부대끼며 함께 해야 할.

메 순간순간 내 곁에서 나를 지배하는.


그리고 그 랜덤박스는 근본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므로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 인생은 왜 이다지도 아름다운 것인지. . . .







18 Jul 2025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28화남미는 정말 부패하고 불안한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