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기 위해 열쇠를 꽂았는데, 열쇠가 돌아가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려야 시동이 걸리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핸들을 좌우로 흔들고 돌려보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열쇠를 살짝 들어 올려 보기도 하고, 왼쪽으로 돌려보기도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러다 우연히 열쇠가 돌아가면서 시동이 걸렸다.
다음 날 아침, 전날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는데, 이번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출근길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오후에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카센터에 들렀다. 정비사는 핸들을 돌려도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키 박스를 통째로 교체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교체하는데 세 시간이 걸리고, 비용은 20만 원 정도라고 덧붙였다. 다음 날 정비를 맡기기로 했다.
그날 저녁, 아침과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열쇠는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고, 이마엔 비지땀이 맺혔다. 아침보다 더 오래 걸려서야 겨우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모된 열쇠’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열쇠를 오래 사용하여 닳게 되면 키 박스가 인식하지 못할 수 있으니, 예비 열쇠로 시동을 걸어보라는 조언이었다. 서랍을 뒤져 예비 열쇠 두 개를 찾아내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두 열쇠 모두 자연스럽게 들어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순간, 안도감과 함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내 차는 15년 전 새로 산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연쇄 추돌사고를 당해 파손된 차를 폐차하고, 새 차를 샀다.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열쇠가 닳아 제 기능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단단한 쇠조차 세월 앞에서는 마모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60년이 넘게 살아온 나는 과연 어떨까? 겉모습은 물론이고 생각 · 태도 · 관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금 나는 가족 · 친구 · 동료 사이에서 여전히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혹시 나도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닳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주위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어색해진 인연, 이유 없이 멀어진 대화, 무심코 지나쳐 온 마음들. 혹시 내가 오래된 열쇠처럼 변해 그들 중 누군가를 더는 인식하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중요한 것은 그 변화를 모른 채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시동을 걸려고 하다가는 언젠가 통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언가를 탓하기보다, ‘내 안의 열쇠’를 먼저 들여다보고, 나도 모르게 닳아버린 부분은 없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때로는 예비 열쇠처럼, 낯설지만 새로워진 시선과 마음가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 안에 오래 묵혀 두었던 예비 열쇠를 꺼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