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순수함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 스포일러 있음.
※ 아래 이미지들의 출처는 왓챠피디아.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스페인의 영화감독 빅토르 에리세의 데뷔작 <벌집의 정령>은, 무척이나 아리송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작품이다. 아나 토렌트가 연기한 순수한 소녀 아나가 경험한 짧은 만남과 영원한 이별을 품은, 슬픔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한 편의 동화.
주인공 아나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한 후, 영상에 등장하는 무서운 괴물에 대한 호기심에 푹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언니 이사벨의 장난이 섞인 거짓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그 미지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폐가에 혼자 찾아가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전쟁을 피하려 기차에서 탈출한 군인과 만나게 된다.
언니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운 군인 아저씨를 인간도 괴물도 아닌 정령이라 여기게 된 소녀는 부상에 빠진 그의 회복을 돕고, 서로를 미소 짓게 하는 둘 사이에는 따스한 우정이 자라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소중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데, 몸을 숨기던 그가 결국 다른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폐가를 찾아간 아나는 누군가의 핏자국만을 발견하고, 잠시 후 그곳에서 그녀가 그 군인의 생존에 관여했음을 눈치챈 아버지의 성난 표정과 마주치게 된다. 겁에 질린 소녀는 공포와 서글픔 속에서 정신없이 도망치고, 아나를 찾던 어른들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간신히 그녀를 발견한다.
쉽사리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방 안에서 말없이 아파하는 아나를 보며, 관객은 그녀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안타까움이 섞인 근심에 빠진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무언가와 교감하려는 소녀의 얼굴이 담긴 엔딩을 응시하며, 우리는 형언하기 어려운 위로와 감동 또한 선물 받게 된다.
<벌집의 정령>의 서사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이제부터는 내 감상을 짧게나마 적으려 한다. 아마도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오직 순수함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말하고 싶었으리라 추측한다. 다시 말해,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의 무서운 외면 안에 감추어진 본질을 알아내고 싶은 소망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이가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도록 만든 온기도, 비릿하고도 싸늘한 진실 앞에서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자격도, 영롱한 별빛을 담을 수 있는 맑은 눈동자도, 때 묻은 어른들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나직이 관객에게 일러준 것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분명 시작부터 굉장했다. 그리고 이제 내게 남은 그의 영화는 <남쪽>, <햇빛 속의 모과나무> 두 편이다. 두 작품 모두 굉장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언젠가 관람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몹시 커다란 설렘을 느끼리라 짐작한다. 마치 아나가 프랑켄슈타인의 정령을 희구했던 그날들처럼.
2025. 0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