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온기와 겨울의 한기가 함께.
※ 스포일러 있음.
※ 아래 이미지들의 출처는 왓챠피디아.
스크린에서 영상이 시작된다. 눈앞에서는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귓속으로는 한 남자가 한 여자에 대해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사람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 우리는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알게 되는 몇 가지가 있다. 남자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여자는 세상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는 자유로이 오토바이를 운전한다. 그녀는 유모차에 불편한 몸을 싣는다. 그녀는 요리를 맛있게 만들 줄 안다. 그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줄 안다. 여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영원을 소망한다. 남자는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채 미래를 약속한다. 어느새 그 둘은 한 쌍의 연인이 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따스한 작품이다. 자신이 동경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불리기 원하는 그녀, 조제의 병명을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모든 이들의 삶을 대표케 하기 위함일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애를 다룸에도 플라토닉이 아닌 에로스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이 얼마나 뜨겁고도 아름다울 수 있는가는 장애와 무관한 것임을 보는 이가 인지케 하기 위함일 것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세상을 무척이나 차갑게 바라본다. 조제에게 꾸준히 관심과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모범적이다. 장애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그녀를 숨기는 할머니, 남몰래 파트너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는 예쁜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는 츠네오, 지나가다 마주하기도 싫은 양아치 코지. 그렇지만 그들은 조제와 소통한다. 괴팍하지만 잡학다식하고, 제멋대로이지만 순수한 그녀의 가치를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사회복지사를 희망하는 카나에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앗아간 조제에게 폭언을 내뱉고, 조제의 집을 방문하는 봉사자들은 시간이 맞지 않아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그들의 꿈과 진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카나에는 너무나도 어리고, 봉사자들은 조제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어쩌면 인간사의 모든 비극이 이런 데서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이 아름답고도 서글픈 이야기는 결말이 정해진 관계를 다룬다. 할머니는 생전에 츠네오에게 그는 그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일갈하는데, 아마 츠네오는 조제와 사귀는 동안 그 말을 수백 번 되뇌었을 것이다. 감정만으로는 짊어질 수 없는 무게가 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허무하면서도 차분한 이별 이후, 츠네오는 길거리에서 통곡한다. 죄책감, 그리움, 도망친 자신에 대한 후회와 같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울음 가운데, 츠네오는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조제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끝내 속으로 고백한다.
작품 초반부, 츠네오는 대신 참여한 마작에서 생애 최고의 패를 쥐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곧 자리를 비켜준다. 아마 조제는 츠네오에게 이러한 존재일 것이다. 인스턴트 스파게티처럼 편리하고도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 잘 차려진 한 끼 식사의 기쁨을 알려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짧은 인연. 그리고 마찬가지로 츠네오 역시 조제에게 그러한 운명일 것이다. 똑같은 소설을 반복하여 읽던 그녀에게 그 속편을 가져온, 그녀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세상을 알려준 사람.
끝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은 분명 비겁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러한 것들이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변화시킴을, 봄의 온기와 겨울의 한기가 함께 담긴 이 찬란한 영화를 통하여, 우리는 깨닫는다.
2024.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