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새벽더위에 시달리다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잤더니, 결국 몸살감기가 찾아왔다. 아내는 부재중이고, 아이들 픽업부터 저녁, 재우기까지 모든 게 내 몫이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했지만, 괜히 걱정시킬까 봐 그냥 해보기로 했다. 셋째, 첫째, 둘째 순으로 픽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요리할 기력도 없어 칼국수를 포장해 왔다.
"얘들아, 미안한데 아빠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그러니 밥 먹고, 치우고, 씻고, 잘 준비하는 것까지 너희들이 알아서 해줄래?" "네~ 걱정 마세요."
아이들의 대답이 너무 씩씩했다.
"아빠, 내가 설거지는 할 테니까 아빠는 밥만 차려주고 가서 쉬세요." 2솔이(4학년, 딸)가 먼저 나섰다.
"1솔아, 그럼 너는 밥 먹고 거실 청소기 좀 돌려줄래?"
"네~"
요즘 대답도 잘 안 하던 사춘기 1솔이(6학년, 아들)마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때도 평소라면 "물 달라, 국 더 달라, 밥 더 달라" 하며 한 숟가락 먹으면 여기저기 시중드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2솔이는 항상 서서 먹는 나를 위해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1솔이는 칼국수를 스스로 덜어 먹었다. 3솔이(막내)도 불평 없이 알아서 잘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하겠다며 싱크대 앞에 선 2솔이가 기특하면서도 미안했다. 아직 설거지를 시키고 싶지 않은 아빠 마음을 아는지 "괜찮아~ 내가 할게"를 연신 반복했다. 미안하지만 2솔이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잠시 후 설거지를 마친 2솔이가 들어와 나를 살피며 말했다.
"아빠,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아빠가 하려고 하지 말고."
"응. 그래 고마워."
"근데 아빠 나 잠깐 핸드폰 좀 봐도 돼?"
아직 핸드폰이 없는 2솔이는 가끔 내 폰을 빌려 친구들과 카톡을 하거나 유튜브를 본다. 힘없는 목소리로 "그래"라고 했더니, 곧이어 1솔이도 와서 자기도 핸드폰이 필요하다고 했다. 둘이 핸드폰을 두고 다툴 게 뻔해서 빠른 대처가 필요했다.
"1솔아, 주방 가서 아빠 오미자차 좀 만들어서 갖다 줄래?"
그런데 갑자기 2솔이가 "아냐. 내가 할게. 오빠 여기 핸드폰. 오빠가 봐"라고 했다.
"아니 괜찮아. 네가 봐. 내가 아빠 심부름할게." 1솔이도 지지 않았다.
혹시 핸드폰을 서로 보겠다고 다툴까 봐 심부름을 시킨 건데, 서로 하겠다며 나서니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문 밖에서 가위바위보 소리가 들리더니 둘이 사이좋게 역할을 나눈 후 1솔이가 차를 가져왔다. 그토록 좋아하는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아픈 아빠를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 예뻤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아프면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서로 다투고, 빼앗던 삼 남매가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고, 친절해지기까지 했다. 부모가 아프면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위협과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아프셨다. 특별한 병명이 있어서라기보다 오랜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으로 자주 쓰러지시고 앓아누우셨다. 그래서 나는 늘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저렇게 힘드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실제로 이모 한 분은 나에게 "엄마가 너 낳고 많이 아프셔. 그러니까 네가 효도 많이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지만 그때 나는 정말 엄마를 위해서 내가 효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어린 시절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아마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다. 집에 엄마 친구분이 오신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나에게 참 착하다며 과자 사 먹으라고 백 원짜리 동전을 주셨다. 그때 백 원으로 과자 하나는 충분히 살 수 있던 때였다. 난 그 돈을 받고 뭘 할까 한참 고민했다. 과자를 사 먹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리어카에서 파는 내 머리만 한 배추 한 통을 샀다. 백 원으로 그 큰 배추를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김치를 담글 때가 아니면 배추 한 통이 그리 유용한 식재료가 아니라는 사실을 난 그때 당연히 몰랐다. 그냥 크고 값진 것 같아서 샀을 뿐이었다.
그걸 들고 집에 가서 어머니께 가져다 드렸다. "엄마, 이거 사 왔어요!" 하고 자랑스럽게 배추를 내밀었을 때, 어머니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곧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가지면 눈치를 보느라 자기감정 표현을 잘 못하게 된다. 싫은데도 싫은 티를 못 내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런 아이였다. 항상 엄마 눈치를 보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아빠를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을 보며 너무 기특하고 예뻤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우리 아이들도 부모가 아픈 것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부모가 아프니까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오늘 아이들과 만나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하듯 아이들에게도 말해야겠다.
"어제 아빠가 아플 때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 너희들이 도와줘서 아빠가 잘 쉬고 금방 나았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야. 그래서 너희들이 너무 자랑스러워. 근데 아빠가 아파도 너희들이 너무 하기 싫거나 또 너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땐 얘기해도 괜찮아. 아빠가 너무 아프면 못 들어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들어줄 테니까. 알았지? 아빠 생각해서 얘기 안 하기 없기다."
'부모가 아픈 것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라는 마음을 전해 주고 싶다.
정말 나의 몸은 하룻밤 만에 다 나았다. 아이들의 사랑 덕분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