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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읕 Mar 08. 2021

#11. 10년 뒤에

2021년 3월 8일 월요일

D-15,573


지금은 새벽 12시 40분.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쓴다.


거의 일주일 만에 맥북을 켰다. 

무슨 까닭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맥북을 켜자마자 크롬에 들어가서 북마크를 눌렀다. 예전에 자주 들어가던 블로그와 사이트 리스트가 주르륵 떴다. 오랜 시간 못 본 친구를 만난 것처럼 묘한 반가움이 일었다. 개중에서 자주 들렀던 카피라이터 블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잘 살고 있나 라는 생각과 함께 클릭.


그러곤 엄청 놀랐다.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이 블로그의 프로필 사진은 뭔가 치열하게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처럼 일부러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젊은 청년 사진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 프로필에는 약간은 까칠한 인상에 중후한 느낌을 풍기는 – 광고 회사로 따지면 부장, 국장급의 – 중년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모니터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사진을 유심히 봤다. 프로필 사진에 예전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었다. 아, 내가 제대로 들어왔구나… 새삼스레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1년 전, 나는 작은 대행사의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2012년 광고 바닥에서는 메이저로 분류되는 대행사에 발을 들였다. 2010년에서 12년 채 2년이 되지 않는 그 시간은 지금 돌이켜봐도 어떻게 버텨낸 걸까 소름 끼칠 정도로 박봉과 야근이 점철된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걸까, 나에게 이 업을 이어나갈 재능이 있긴 한 걸까 따위의 불안이었다.


그때는 공부를 한답시고 블로그와 카페를 부단히 뒤지고 다녔다. 세상에는 참 실력자가 많았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곳들을 즐겨찾기에 등록하고 열심히 들락날락 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뒤졌던 블로그들은 내 기억에서 대부분 지워졌다. 그런데 유독 이 블로그만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 


돌이켜보면 이 블로그에는 카피 실력을 키우거나 테크닉을 얻으려고 들어가진 않았다. 이 블로그 주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당시에는 크게 영감을 받을 만한 내용들이 솔직히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여기에 자주 들어가고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일종의 동질감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당시에 카피라이터 지망생이었고 습작들을 열심히 업로드 했었다. 별 볼 일 없지만 치열한 고민과 열정이 들어간 습작 카피들을 보면서 까닭 없이 귀하고 애틋했다. 이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던 거다.


무턱대고 열정 넘치는 그 진심에 위로를 받았다. 야근을 넘어 밤샘이 몇 날 며칠 이어질 때에도 슬쩍 이 블로그를 찾아와 기운을 차리곤 했다. 그렇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카피라이터 지망생에서 카피라이터가 되고 이름 있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까지 멀리서나마 함께 했다. 지금도 여전히 카피라이터로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는 걸로 보인다. 


나는 이제 클라이언트 사이드로 넘어와 직접 카피라이팅을 마무리하지는 않지만, 카피라이팅의 힘을 믿고 여전히 크리에이티브의 날을 세우는 사람으로서 이 블로그의 방문은 오랜만에 들은 친구의 소식처럼 매우 반가웠다. 그 사람의 블로그에 나는 누구고 이런저런 연유로 힘이 되었다고 고맙다고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 그냥 여기다 쓰고 만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10년 뒤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고마운 사람으로 자리를 지켜주길 바랍니다.

저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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