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같은 한 장면
내 인생에서 영화 같은 한 장면을 떠올리니 경전철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때는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나는 여자인데도 눈물에 인색하다. 내 무의식에 ‘나는 강한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있어서인지 눈물 흘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성인이 된 자식들이 어릴 때도 우는 것을 싫어해서 ‘뚝 그쳐’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울 때도 소리 내어 울기보다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는 느낌이다. 어릴 적 아침밥을 먹으면서 부모님께 혼난 적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으로 혼이 났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눈물을 삼키며 울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감정을 밥과 함께 꿀꺽 삼키니 목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눈물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남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싫지만 눈물을 흘리면 코가 제일 먼저 빨갛게 변해서 가족들은 내가 울었는지 금방 안다. 그래서 우는 것을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가 눈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7년 전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에게 위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담담하여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는데 위를 남김없이 모두 절제해야 한다는 말에 그동안 강한 의지로 버텨왔던 감정들이 눈물을 통해 쏟아졌다. 당황한 남편이 위로의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내 몸의 일부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고 사라질 ‘위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 집은 지방에 있었고 남편이 수도권으로 발령이 나서 주말부부로 지냈다. 서울을 오고 가며 급하게 수술은 했고 항암치료를 8번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부작용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커서 치료받기가 싫었다. 그러나 남편의 완곡한 부탁으로 1차로 항암 주사를 맞게 되었는데 주사를 맞을 때는 별문제 없었다. 늦은 저녁을 겨우 먹고 집까지 데려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남편을 안심시키고 웃으며 인사한 후 비행기에 탔다.
공항에 도착하자 속이 울렁거려 택시를 탈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멀미를 자주 하는 편이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복잡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망함, 하기 싫은 항암치료를 받게 해놓고 아픈 나를 혼자 보낸 남편에 대한 서운함, 내 처지에 대한 슬픔의 감정들이 뒤섞인 채로 그냥 전철에 올라탔다. 마침 자리가 비어 앉았는데 그때부터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의식하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고 막혔던 눈물샘이 폭발했는지 한꺼번에 쏟아졌다. 누군가 휴지를 건네줄 법도 한데 화장지나 손수건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 내가 우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알 수가 없다. 그렇게 30분쯤 지나자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고 신기하게도 종착역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이 그쳤다.
역에서 내려 화장실에 제일 먼저 달려가서 얼굴을 봤는데 코만 빨개져 있고 내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동안 가슴에 묻었던 감정들이 눈물을 통해 사라진 느낌이었다. 남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마음도 사라지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비장한 마음이 올라왔다. 가슴이 시원했다.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군대에 있었고 딸은 고3이라 학교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위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을 오롯이 혼자 보냈다. 항암 부작용으로 식욕이 완전히 떨어져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소파에 파묻혀 늘어져 있었으나 정신은 또렷하고 맑았다. ‘못 먹어서 죽을 바에 자연치유로 편하게 살다가 죽자. 가족은 내가 아니니 내 고충을 알지 못한다. 내가 나를 살려야겠다.’ 생각을 바꾸니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힘이 생겼다.
그 후로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치유를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5년이 되던 날 완치 판정을 받았고 지금은 7년째이고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눈물이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었고 새 삶을 살게 해주었으니 나에게 눈물은 치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울고 싶으면 울게 놔두는 것, 슬픔을 슬픔인 채로 겪어보는 것,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그것이 눈물이 나에게 가르쳐준 삶의 지혜이다. 요즘은 누가 울면 그냥 실컷 울게 그냥 둔다. 우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충분히 울 수 있도록 말없이 그 순간을 지켜주는 것뿐이다. 울어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