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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주스

2025년 2월 14일 열 아홉 번째 일기

by 무무

토마토 주스는 맛있다. 엄밀히 말하면 토마토만 간 주스는 크게 맛이 없어도, 요구르트나 시럽을 넣어서 같이 갈면 달달하고 건강한 맛의 음료가 된다. 모든 과일 주스가 조금씩은 그렇지만, '토마토 주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편의점 음료들은 하나같이 토마토 주스 같지 않다. 대게 더 달콤하거나 묽은 케첩 맛이 난다. 실제 케첩의 용도로 설명서에 나와있는 게 주스 만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나름 충격을 받았었던 기억도 있다. 한창 생과일주스 전문점이 유행할 때는 흔히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생각보다 그리 찾기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딸기 바나나는 거의 고정이고, 복숭아나 키위, 여름엔 모든 카페에서 앞다투어 수박주스를 출시하지만 토마토라고 하면, 어쩐지 외면받는 느낌인 거다. 과일인 듯해도 사실 채소 주스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출근길에 늘 지나치던 거리에서 문득 토마토 주스 메뉴판을 봤다.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지나치는 곳이었는데, 원래도 토마토 주스가 있었나 싶었다. 가끔 가다 커피를 마시거나, 여름에는 수박주스를 사 먹었던 가게라는 기억은 있는데, 토마토 주스를(언제부터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지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살짝 안 좋은 속에는 또 토마토 주스 만 한 게 없으니,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 전문점인 줄 알았는데 주스 품목이 거의 10개였다. 다른 건 다 평범한 메뉴들이었고, 겨울 한정이라는 홍시주스에 관심이 좀 갔는데, 오늘은 토마토로 선택했다. 홍시주스는 뭐랄까, 묽은 홍시를 빨대로 먹는 맛이려나. 다음에 시도해 봐야겠다. 기회가 된다면.


믹서기에 잘 갈려 나온 토마토 주스는 시원하고 달콤했고, 옛날의 그 맛이 났다. 아직까지 학교에 다니던 시절, 대부분의 집이 그렇듯 부모님이 맞벌이였기 때문에 학교가 끝난 나는 보통 조부모님의 집에 가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손주들에게 언제나 무언가를 먹이고 싶어 하시는 할머니는 언제나 간식을 내어주셨는데, 토마토 주스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가끔 실험적인 메뉴들을 하시곤 했다. 청소년, 성장기인 나(그리고 사촌)의 성장을 위해 미숫가루에 멸치를 갈아 같이 넣으신다거나 그런. 얼마나 충격적인 맛이었으면 이걸 아직 기억할까. 다른 예시도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멸치 미숫가루가 너무 압도척이다. 그 달콤한 비린맛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 먹어도는 맛이었는데 차마 삼키기 힘들긴 했다. 정성을 생각해 한 잔은 꾸역꾸역 마셨는데, 대단한 맛이었다. 뭐, 아무튼 멸치 미숫가루는 아니었지만, 토마토 주스는 할머니의 주력 메뉴 중 하나였다.


토마토와 요구르트를 적당한 비율로 넣고 갈면 끝. 둘의 조합은 정말이지 찰떡이다. 빨리 먹지 않으면 토마토와 요구르트가 재 분리 되어 층이 나눠지는데, 뭔가 그 층이 나눠지고 나면 다시 섞고, 다시 섞기를 반복할수록 맛이 떨어지는 느낌이라 보통 짧은 시간에 꿀떡꿀떡 마셨던 기억이 있다. 오늘도 그랬다. 고작 1~2분 걸리는 카페에서 회사가지 가는 그 거리 동안 절반 정도를 먹어치웠다. 사무실에 도착해 커피를 내리고 나니 살짝 뒷전이 되었으나 두, 세 모금 남은 정도였다.


주스 하나를 마시며 세 가지 즐거움이 있었다. 주스는 그 자체로 맛있었고, 울렁거렸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었으며, 어쩐지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질풍노도의 10대로 퉁 쳐지는 그 옛 순간들 속에도 간간히 괜찮은 혹은 웃었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게 문득 기억이 나서(멸치 미숫가루 같은) 기분이 좋았다. 학교나 학원이 끝나고 트럭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사 먹었던, 정말 맛있었던 떡볶이 한 컵. 군것질로 몰래 처음 먹어봤던 삼각 김밥. 유독 강한 바람이 불어와 거의 기댄 몸을 지탱할 수 있던 수준의 골목, 넓은 주차장 부지에 살던 사나운 강아지. 한 겨울에 즐겼던 피자 붕어빵. 공부하기 싫어, 수업을 빼먹고 하루종일 하던 게임. 뭐, 그런 것들까지도 말이다. 감성적으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금요일이라 별 거 아닌 것에 더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고.


주스 한 잔에 옛 생각까지 하는 오늘이었다. 10대 때는 다채롭게 힘들었고, 너무나도 미성숙했기에 그다지 좋아하는 시기는 아니지만. 만약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면 아마 글감을 찾느라 더 힘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나 또한 가끔 웃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럼 내일도 웃을 일이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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