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다.
20대 초반, 나는 틈만 나면 어른들께 안부 전화를 드리거나 직접 찾아뵙곤 했다. 그럴 때면 “기특하다”, “속이 깊다”는 칭찬을 종종 들었다. 사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만 마음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런 작은 도리를 행하는 것이 나에겐 작은 기쁨이었다.
20대 중반 후반의 시기는, 신앙 때문에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던 때였다.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던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유독 지인들의 경조사, 사촌 형과 누나 자녀들의 돌잔치, 외가와 친가 어른들의 칠순·팔순이 연달아 겹쳤다.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그 마음만 있던 진심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때, 교회에서 “마음 가는 곳에 물질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가 곧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거나, 하나님보다 세상과 돈, 성공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의미였으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음 둘 물질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물질도 나는 이미 없었기 때문이다. 20대 내내, 그런 물질의 부족함을 겪으며, 마음보다 느린 물질의 속도에 화가 나기도 했고, 그로 인해 받았던 오해들을 견뎌내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30대가 되어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주변 지인들에게서 “돈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야 뭐 그렇다 치지만 계속해서 직장생활을 해왔는데 왜 돈이 없을까? 라며 말이다. 뭘 하려는데 돈이 없고, 어디를 가고 싶은데 돈이 없고, 경조사를 챙길 여유도 없고, 부모님께 드릴 돈도 없다는 말들.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20대처럼 그들도 정말 형편이 넉넉지 않은 줄로만 이해했다.
결혼을 하고 경제적으로 조금의 여유를 갖게 된 뒤부터, 차차 ‘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은 관용적 언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 밥이나 커피를 사는 일, 편찮으신 친척 어른을 찾아뵙고 약간의 용돈을 드리는 일, 초등학교에 입학한 친구의 자녀에게 작은 축하금을 건네는 일, 부모님의 여행 경비를 보태드리는 일 등, 이런 일들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일들이었던 것이었다.
결국 정말로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나에게 쓰고 싶지 않은 돈이었고, 너에게 쓰고 싶지 않은 돈이었으며, 그 자리에 쓰고 싶지 않은 돈이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마음과 상관없이 선택지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삶도 분명히 존재한다. 구조적인 가난과 빚,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 앞에서는, ‘어디에 돈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마음이 없다는 건 ” 그런 삶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거나, 여유가 없는 사람을 향해 숨 막히는 잣대를 들이대려는 표현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선택에 자유가 있을 때, 한정된 여지 안에서 무엇을 더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지, 내 마음의 방향을 천천히 들여다보자는 쪽에 가깝다.
살다 보면 마음은 있어도 함께할 물질이 없을 때가 있고, 반대로 물질은 있으나 마음이 따르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 가는 곳에 물질이 있다”는 말이 참 좋다. 누군가 내게 밥을 사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시간을 내줄 때, 그 밥이나 커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말은 나에게 상대가 써주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우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강퍅한 내 마음을 비추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 가는 곳에 물질이 있다는 건 신앙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