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부터 준비한 여행이라 하더라도, 진짜 여행을 떠나게 될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책 원고 마감과 이사로 지난 몇 달을 정신없이 보낸 탓이기도 하다. 원체 닥쳐야 움직이는 극 P 성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젯밤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불현듯 여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불안함과 공포가 나를 목죄어왔다. 제대로 준비한 건 맞나, 빠뜨리고 예약하지 않은 건 없나, 가서 잘할 수 있을까.
가장 두려운 건 딸아이였다. 그런 나 자신에게 조금 놀랍기도 했다. 어렸을 때 말이 늦었던 아이는 자주 징징거렸고, 아이가 울 때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동네 앞 마트에 아이를 데려가는 일조차 버거웠었다. 이를 핑계로 나도 모르게 아이를 향해 원망을 키워왔었나 보다. 나의 계획과 진로를 무겁게 만들고 때로는 똑똑 부러뜨리기까지 했던 존재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내 맘 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던 작은 공포가 잠시 튀어나왔던 것뿐이었다. 나는 아이와 이번 여행을 즐겁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딸은 요즘 말을 잘 안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겐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딸이다. 굳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스스로 준비물과 자기 할 일을 챙기는 딸이다. 밖에 나가서 물건을 잘 흘리고 다니는 나를 챙겨주는 딸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꼭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도 유연하게 상황을 대처하는 여유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아이가 어렸을 때보다는.
한밤 중 잠시 잠깐 공포를 마주하고 떠나보내고 나니, 여행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차오르는 듯했다. 내일은 비행기, 숙소, 기차 등 예약한 페이지들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출력을 해야겠다. 짐도 조금씩 챙겨야겠다. 구체적으로 준비를 시작하면 불안감은 줄고 기대는 올라가겠지.
202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