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철학 뒤집어보기
약 500여 쪽에 이르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평생에 걸친 도덕경 연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2020년 10월 발행해 1년만에 7쇄를 찍었다. 이 분에 대한 대중들의 감각은 다양하지만 자기 학문에 대한 끈질긴 승부 근성 및 확실한 자기 주장은 높이 살만하다.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읽는데 그리 큰 부담은 없다. 노자 도덕경을 통한 세태 분석도 나름 흥미있는 이 책의 내용은 한번 사서 보기를 권하고,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 보는 것으로 책 리뷰를 대신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도를 도라는 언어개념 속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 개념화 된 도는 항상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도의 실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
'영원불변의 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존재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불변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변화의 다양한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불변' 이나' 영원' 이라 말하는 것은 모두 시간 속의 지속태일 뿐이다. 시공간 내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복속된다는 것이 자명한 상식이다. 파르메니데스도 플라톤도 사도 바울도 시공간 내에서 불변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발견한 불변의 장소가 수학(기하학)이었고, 수학의 자리가 관념이었고, 관념의 자리가 바로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일진대, 그것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의 법칙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 , 명가명 비상명'의 의미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나 문명이 추구하는 것은 모든 진리가 '상도'와 '상명'을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도와 명의 긍극적 실상은 '상'에 있다는 것이며, 상에 있다는 것은 시공간의 변화 속에 있다는 뜻이다. 불변의 도, 불변의 명을 추구하는 삶은 허망한 것이며 위선적인 것이며 시의를 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불변의 절대적 존재라고 서슴치 않고 말한다. 그러나 노자가 '도가도 비상도'를 말한 뜻은, 하나님도 반드시 시공 속에서 항상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공간의 변화와 무관한 하나님은 하나의 개념적 픽션이며, 저열하고 단순한 약속(conventionalism)에 불과하다. 바로 시공간 속의 인간존재를 하나님으로 파악하는 것이 '상'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노자의 말들은 너무도 상식적이고 쉬운 말들일 뿐인데 그것이 쉽지않게 들리는 것은 쉬운 것을 쉽게 듣지 못하는 왜곡된 귀의 구조가 이미 이 사회의 들음의 정도인 양 정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형용사, 부사일 뿐이라는 그토록 단순하고도 소박한 상식이 들릴 수 없도록 모든 사유가 명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 action without self- assertion, 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
< 소유없는 생성, 자기고집 없는 행위, 지배 없는 성장! >
서구인들은 희랍인들로부터 문화와 예술과 철학과 순수과학, 그리고 사회관의 세련된 측면을 배웠다.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는 신념으로 포장된 광신적 신앙, 죄의식을 동반한 도덕적 열의, 종교적 불관용, 그리고 서구 국가주의의 위선적 측면을 배웠다. 그리고 산업주의화 된 과학으로부터는 권력과 권력의 맛, 또는 우리가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착각, 그래서 비과학적인 종족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을 배웠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실제적 지식을 획득하는데 사용되는 경험적 방법을 과학에서 배웠다. 이 세 요소야말로 서구정신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_B Russel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道
난득지화를 귀하게 만든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회진보의 계기들이며, 경쟁을 유발시키기 위한 묘방으로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사회의 진보, 과학의 진보, 자본의 진보가 모두 난득지화를 귀하게 만드는 데서 그 본질적 계기를 만들어온 것이다. 그러한 진보의 결론은 무엇인가? 사회 진보의 결론은 모든 사람들을 도둑놈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둑질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심 낼 만한 것들을 계속 보여주면서그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노자의 역문명사적 경고를 들으면서 우리는 사회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념이나 막연한 기대를 수정해야만 한다.
見素抱樸 少私寡欲
현소는 소박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고 포박은 통나무를 껴안는다, 즉 가장 절박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욕심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는 무사무욕을 말하지 않고 소사과욕의 현실적 처방을 말한다. 여기서 '소'와 '과'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일정한 눈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적게 하고 끊임없이 줄이는 역동적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의 살을 빼는 것도 끊임없이 줄이는 것이다.
'德'은 '道'라는 보편적 존재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앖는 개념이지만 , 현실적 존재와 관련하여 그 기능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며 도라는 보편자로부터 쌓아가는 것이다. 덕은 도에 대하여 개별성과 현실성이 있는 개념이다. 도는 애초부터 무형이요, 무명이었으며 불가도 불가명이었다. 그런데 서방사람들은 보편자를 이름지으려 했고, 존재물화 했고, 신앙의 대상으로 구체화 시켰다. 가장 비극적인 인류의 오류는 '하느님'을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인격적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은 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성은 남성이 된다. 남성인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고, 억압과 권위와 냉혹과 잔인의 모든 덕성을 구현하게 된다. 남성은 여성에 대한 압제 속에서 남성됨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인격적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두려움과 소망 같은 감정을 투영하는 하나의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사랑의 가르침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그 가르침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타자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소외시키고 저주하고 파멸시키는 매우 합법적인 수단이 된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적 신성의 위험성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범주를 넘어서는 초월적 신개념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가 진보한 다는 것은 역사 그 자체가 不善에서 善으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당 찮은 독단이요, 독선이요, 관념의 독주이다. 역사는 시간이고, 시간은 변화이고, 변화는 상대적 가치의 포용이다. 시간 그 자체에 가치를 물을 수 없다. 가치적 판단은 모두 사람의 판타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시간에 부여한 형이상학적 폭력이다. 인류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땅위에서 시간과 더불어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인류가 모두 '역사의 진보'를 믿는 병에 걸렸고 그 병은 20세기 대중교육에서 온 것이다. 즉 인류의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래 과학과 기술의 결합으로 인하여 눈부신 문명도구의 발전이 이룩되었고, 이러한 테크놀로지 혁명이 인류공동의 생활 체험의 변화를 초래한 데서 생겨나기 시작한 망상이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강력한 변화를 '진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게 된것은 과학만능주의와 과학자들의 보수적 신관과 섭리사관, 구속사관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적 역사인식이 결합되어 마치 역사 그 자체가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처럼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보'는 과학의 발전, 자본의 확대재생산, 신의 섭리와 구속, 유토피아 이론의 세속화 등등이 결합한 지난 두 세기의 역사경험에 국한된 특수한 망상이다. 이러한 망상을 역사 그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소아병적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역사의 시간은 수없이 많은 삶의 시간들이 착종된 것이다. '진보'라는 터무니 없는 일반화 된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Ps ; 도덕경은 현실의 피안을 논한것이 아니라 기열찬 정치철학이다. 도덕경의 긴 내용은 다음 네 구절로 귀결된다.
바로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이다.
먹는거에 곤궁하지 않고 입는것에서 자유로우며,편한한 집에 기거할수 있고 원하는 바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두 희구하는 이상사회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