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지>, 폴란드의 숨은 보석 속 노른자
누군가 중세와 현대 역사의 개성이 모두 담긴 폴란드 도시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루블린을 바라보게 하라.
-흑투리 뇌피셜센터
흔히 폴란드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도시는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이다. 그러다가 폴란드 관광 책자를 좀 뒤져보셨다면 그단스크, 토룬까지는 생각날 것이다. 그렇다면 루블린은 어떤가? .....뭐, 생소하다고?
그럴 만도 하다. 본인도 폴란드에 관한 여행 책자들을 여러 권 찾아봤는데, 그 많은 책들 중 '루블린'이란 도시를 소개하는 책은 단 한 권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끽해봐야 간략한 폴란드 역사책에서 몇 번 언급되는 것이 전부다. 그만큼 이 도시는 유럽 여행은 물론이고, 폴란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마저 관심을 잘 안 보이는 도시이다.
하지만 무려 17군데에 달하는 폴란드 지역을 방문한 투리에게 있어, 루블린은 투리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특징을 가진 소도시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투리가 보기에 폴란드의 역사가 가장 콤팩트(compact)하고 개성 있게 드러난 도시는 그단스크도, 브로츠와프도 아닌 루블린이기 때문이다. 중세의 성벽과 르네상스 거리, 유대인의 비극 현장과 공산 폴란드의 시초 지점이 모두 소도시 하나에 모여 있다면 믿겠는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유일한 도시가 바로 루블린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여러분은 앞으로 본인의 기행글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폴란드에 입국한 지 6주 차 되는 날. 이번에도 투리는 Flixbus를 통해 목적지로 향했다. 다만 이번에는 버스의 이동 경로가 확실히 달랐다.
바르샤바 서쪽에 있는 우치나 브로츠와프와 달리 루블린은 동남쪽 방향에 위치해 있다. 루블린은 오히려 바르샤바보다 우크라이나 국경 쪽에 더욱 가까이 있어서, 폴란드 집중 여행보다는 르비우나 다른 동구권 도시들을 여행하는 경로에서 선호되는 도시이다. 물론 이 글이 업로드되는 현재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에 휘말린 상황이라 그런 일은 없겠지만. 루블린은 아마 관광 가능한 주요 도시들 중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있는 몇 안 되는 곳들 중 하나일 것이다.
루블린이 속한 주는 루벨스키에 주(Województwo lubelskie)로, 해당 주의 대표 도시 역할을 맡는다. 이 주는 유독 우크라이나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르비우 일대와 그 맥을 같이하기 때문에 동구권 유럽 지역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투리가 생각하는 루블린의 또 다른 매력은 이곳에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건축 양식도 약간씩 섞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에 가까운 만큼 이 도시는 수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받고 있는 지역에 속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투리는 여행하면서 치안이 딱히 나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이 부근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에 대한 갈등이 심했던 소식을 접한 기억이 있다. 그 정도로 많은 숫자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관련 NGO나 여러 교회, 자선 센터가 루벨스키에 주에 몰려 있다고 한다. 어쩌면 투리가 건너 건너 아는 한인 선교사 분도 이 부근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루블린이란 도시가 어떤 곳인지 천천히 둘러보도록 하자! 위 사진을 보면 느끼겠지만, 이쪽은 우치나 크라쿠프에 비하면 터미널 근처가 비교적 한산하다. 대도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점점 중심 지역 쪽으로 올라가니, 점점 마주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양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대도시도 좋지만, 본인은 이렇게 현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유럽 풍경도 선호한다. 보통은 후자 쪽이 상대적으로 덜 심란한 데다가 거리가 깨끗할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위의 맑은 날씨의 사진들을 한 번 감상해 보시길. 확실히 깔끔하지 않은가?
올라가면서 가장 먼저 발견한 랜드마크는 루블린 대성당! 이 성당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글에서 더욱 자세히 하도록 하고, 이번 글에서는 도시와 시가지 쪽을 집중적으로 감상해 보자.
자, 성당을 지나치고 좀 더 걸으니, 드디어 구시가지로 보이는 거리가 보인다! 지금부터 계속 사진으로 보여주겠지만, 루블린은 폴란드의 '숨은 보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리와 구시가지가 상당히 아름다운 곳이다. 그만큼 이곳은 주변 건물들의 색감과 분위기가 아기자기하고 예쁘기 때문이다.
우선 시가지에 들어오자마자 마주한 대표적인 랜드마크! Bromo Krakowska라고 불리는 이 크라쿠프 문은 14세기에 건설되었는데, 이 루블린 구시가지 주변에 있는 성벽과 함께 만들어졌다고 한다. 해당 문이 크라쿠프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이 문이 크라쿠프에서 루블린을 거쳐 빌뉴스(現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길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고로 문 안에는 루블린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도 따로 있다.
꽤나 괜찮은 풍경 같지 않은가? 도시 유명세를 빼고 봤을 때, 거리 감성으로 따지면 딱히 다른 중부 유럽 도시들에 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러한 건물들과 거리에는 나름의 역사도 담겨 있다. 방금 앞에서 나온 루블린 시청은 19세기 초에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곳인데, 이 자리는 원래 중세 시대에도 루블린 시청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루블린의 구시가지 거리 구조는 그 형태가 중세 시대부터 기원했다. 아무래도 이 도시는 10세기경 동쪽 국경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그럴듯한 성벽이 세워진 건 외부의 지속적인 침공에 보다 못한 카지미에시 3세(Kazimierz Wielki)가 도시에 돌을 둘러 요새화한 14세기 초이다. 아쉽게도 현재 여러분이 보고 있는 건물들은 중세 시절의 것들은 아니고, 르네상스나 바로크 이후 시대에 복원된 것들이다. 건물이 복원될 당시에는 루블린에서 자체적으로 르네상스가 성행했을 시기라서, 그 고유의 스타일이 거리에 덧입혀졌다고 한다.
참고로 중세 시대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지금 위의 사진에 있는 그로드츠카 문(Brama Grodzka)이나 아까 봤던 크라쿠프 문, 그리고 일부 성벽 잔존부에 불과하다. 그 외의 거리에는 성곽이나 구조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하튼 동유럽 스타일의 르네상스 양식이 덧붙여지긴 했지만, 이 거리에는 중세 시절의 분위기와 구조가 듬뿍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골목이 물가도 싼 데다 현지인들만 아는 거리다? 조금은 군침 돌지 않는가?
이렇게 중세에 관한 설명은 어느 정도 독자 여러분께 설득을 시킨 것 같고. 아까 이 글의 제목에 '왕국, 비극, 혁명'이라는 단어가 있었던 거, 기억하는가? 지금부터는 이 부분을 여러분께 설명드릴 예정이다, 좋은 사진들로 여러분의 눈정화를 시켜주면서 말이다!
먼저 왕국에 관한 얘기부터 해보자. 방금 전 루블린 주변에 만들어진 성벽의 시기는 14세기라고 언급했었다. 카지미에슈 왕은 루블린 성(Zamek Lubelski) 역시 성조 성곽 형태로 재건했는데, 이때 이 도시가 왕의 임시 거처이자 행정 중심지로 격상되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루블린 성은 동부 원정길에 오를 때 머무르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위 사진에 보이는 곳이 바로 루블린 성이다. 생각보다는 사이즈가 꽤 크다. 저 정도 크기라면 요새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이 루블린 성은 1569년에 루블린 연합(Unia Lubelska)이 형성된 곳이기도 한데, 당시 지그문트 2세(Zygmunt II) 왕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표들을 성으로 모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했다고도 한다. 이 연방이 당시에 유럽에서 굉장한 영토와 영향력을 가졌던 나라였다는 걸 생각하면, 루블린의 가치는 폴란드에서 절대로 작지 않은 것이다.
다음으로 비극에 대해서도 말해보자. 이 글을 투리의 글로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잘 모를 사실이지만, 폴란드에는 역사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흔적이 유럽에서 많은 편이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크라쿠프에 유대인 거리로 유명한 카지미에시 거리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루블린 역시 유대인의 역사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이곳도 나름 규모 있는 도시인만큼 한때 유대인 공동체가 크게 성장했었는데, 비참하게도 이들은 독일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이들이 몰살당한 곳은 루블린 외곽에 있는 마이다네크 수용소(Majdanek, KL Lublin)였다. 루블린의 경찰 사령부는 이곳에서 1943년 11월 3일과 4일 단 이틀 동안 43,000명의 유대인을 총살했는데, 이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나치가 저지른 단일학살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이 수용소에 관한 자세한 내용도 다른 기행글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 외에도 유대인에 대한 흔적은 아까 사진 속에서 지나갔던 그로드츠카 문 안의 건물에도 찾을 수가 있다.
보통 루블린을 웹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이렇게 위 사진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의 건물들만 보이는데, 유대인의 학살 흔적이 남은 기념관도 존재할 줄이야. 어찌 보면 전혀 극과 극 아닌가? 그럼에도 이곳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인과 연관이 깊은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중세와 르네상스, 현대의 역사가 이 도시 안에 다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직 혁명에 관한 얘기가 남아 있다. 루블린은 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의 무대가 된 장소이기도 하다. 루블린에는 세계 2차 대전 시절 노동자와 지식인 중심의 혁명적 분위기가 강했고, 좌익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나치가 후퇴하자 소련의 지원을 받는 폴란드 공산 세력은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루블린 정부, Polski Komitet Wyzwolenia Narodowego)를 이곳에 세워 공산 정권의 시작을 알렸다. 이 정부는 소련의 괴뢰 정부와 다를 바가 없었고, 나중에 바르샤바로 옮기면서 공식적인 폴란드 인민정부의 모체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역사는 투리가 이전 글에서 상세히 언급했으니 참고하실 분들은 참고하셨으면 좋겠다!
휴! 딱딱한 역사 이야기는 이제 끝났고, 이제부터는 편하게 루블린 구시가지 주변이나 돌아다니면서 가벼운 얘기나 해보자. 결론은 얼핏 봤을 때는 예쁘고 귀엽게만 보이지만, 저런 무시무시한 역사의 상징으로도 유명한 도시가 루블린이라는 말이다. 도시의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과거의 핵심 역사들은 또 잘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관광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으면서 가장 폴란드스러운 도시를 하나 고르라고 하면 투리는 루블린을 고를 것이다. 만일 폴란드 여행을 도시 하나밖에 못 도는데 균형 있고 알차게 여행하고 싶다면 감히 말하건대 루블린을 가라. 이 안에는 성, 수용소, 박물관. 모든 요소가 있다.
한참을 시가지를 돌아다니면서 경치를 즐기고 있는데,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적절히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아서 버거로 저녁을 때웠는데, 뭔가 입이 심심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lody 가게에 가서 처음으로 폴란드 아이스크림을 시식해 보았다! 아쉽게도 투리가 좋아하는 순수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없어서 쿠앤크 아이스크림으로 주문을 했지만, 그럼에도 단맛이 들어가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국의 일반 아이스크림이랑 다른 점은.....음.....잘 모르겠다.
폴란드의 구시가지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여행을 하면 낮 경치 다르고 밤 경치 다르다. 어두운 밤을 분위기 있게 밝히는 건물과 불빛들의 모습은 더욱더 투리의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주는 것만 같다. 정말로 낭만적이지 않은가, 이 사진들 말이다!
그래도 본인이 길치 성향이 있어서, 구시가지 밖을 제대로 돌아본 것 같지는 않아 이번에는 평범한 루블린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한밤중에 혼자서 유럽 거리를 걷다니, 본인도 확실히 담대한 면은 있어 보인다.....는 말은 농담이고, 실제로 폴란드 대다수 도시들은 밤길이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다. 그래서 투리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이렇게 연재를 계속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인적이 드문 곳은 사양이지만.
그렇게 한참을 다른 쪽으로 가 보니, 역시! 아까 낮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풍경들이 투리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 형형색색의 불빛 속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밤의 분수는 공원 주변의 커플들에게 낭만을 주기에 충분했다. 본인이 서 있는 이곳은 바로 리투아니아 광장(Litewski Square) 쪽! 이 광장은 1820년대에 군사 행진을 열기 위해 조성된 루블린의 중심가로, 국가 행사를 비롯한 여러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할 이 랜드마크! 다른 도시의 횡단보도를 비추고 있는 이 거울 모양의 포털은 루블린과 빌뉴스를 잇는 설치물이라고 한다. 즉, 빌뉴스 쪽에 있는 설치물 앞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음성 지원이 되지는 않아서 의사소통은 시각적인 수단으로만 제한되지만, 저렇게 다른 도시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포탈이 대형 사이즈로 존재하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서로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루블린은 리투아니아에 있어서도 각별한 도시라는 걸 나타내는 하나의 사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이번 글에서는 루블린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와 구시가지의 이모저모를 여러분께 소개해 보았다! 물론 이 글에서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의 면모밖에 보여주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루블린 안에 담긴 사연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장 폴란드스럽고 가장 콤팩트한 소도시, 루블린! 다시 말하지만, 적당한 소도시에서 폴란드의 감성을 느끼다 가고 싶다? 루블린을 바라보아라! 폴란드의 역사가 궁금하거나 소도시 여행이 취향인 분들이라면, 방문할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