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목록: 서울 집 (5년 전 담음)_19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포기했다. 고심했던 사랑 아파트 A 타입은 그렇게 물 건너 갔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다잡고 생각하자, 사랑 아파트 B 타입이 떠올랐다. 더 넓은 평수에 인테리어까지 되어 있는데도 같은 평수 대비 시세보다 싸게 나와있던 매물이다.
사실 저렴한 가격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세로 세입자가 입주해 있었는데, 전세가율이 너무 낮은 게 문제였다. 그리고 계약갱신청구권을 써서 만료까지도 꽤 남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원래 가진 돈에 주택담보대출을 더해서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실거주가 아닌 갭투자를 하게 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전세 낀 물건은 주담대가 불가능했고, 실거주가 안된다고 하면 현재 살고 있는 집에 들어있는 보증금도 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우리 예산에서 약 2억 원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매매가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지금 부동산 시장이 움직이는 속도를 보면 망설이는 순간 누가 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매물을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들 것 같았다.
계획에도 없던 2억을 마련할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짧은 시간에 많은 계산이 오갔다. 검색해 보니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루트가 여러 개 있어 보였고, 가족 찬스와 신용대출까지 더하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았다. 잔금을 치르기 전까지는 월급도 계속 들어오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확률이 높다고 판단 내렸고, 우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자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전 집 계약을 포기한다고 통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잘알 부동산 소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까 사랑 아파트 A 타입 포기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거 때문에 연락드린 건 아니고요. 나와있는 B 타입 갭투 매물 저희가 하겠습니다.”
“제가 추천드렸던 거 말씀이시죠? 자금이 안된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
“네 좀 계산해 봤는데 가능할 것 같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B 타입 물건이 훨씬 좋은 조건이에요. 그리고 이 집 주인분은 지금 시골 내려가 계시고, 연세가 많으셔서 이전 분처럼 돈 장난치고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그 말에 한결 안심이 됐다. 소장님은 바로 집주인과 통화해 보고 연락 주겠다고 했다.
사실 그 집은 아직 들어가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다른 매물을 보고 있었으니까. 뉴스에서 '집 보지도 않고 계약한다'는 기사가 종종 나왔는데, 그게 우리 케이스였다.
무모한 결정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하지 않았다. 이미 그 아파트 단지를 여러 번 다녀오며, 해당 동과 층에서 나오는 뷰까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건 집 내부의 컨디션 뿐이다.
다행히 그 집은 인테리어를 한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다. 설령 내부가 조금 별로더라도, 리모델링 안 된 집보다 낫지 않은가. 무엇보다 가격이 시세 대비 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소장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서 불안했다.
“아, 어쩌죠. 500만 원만 더 얹어줄 수 없냐고 하시네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시나리오라 놀라지는 않았다. 남편과 나는 마지노선도 이미 3천만 원까지는 더 올려줄 수 있다고 정해둔 터라, 오히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금액에 의아했다.
그래서 부동산 소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남편과 서로 3초간 눈빛 교환 후 바로 그렇게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소장님은 다시 주인분께 계좌를 받아오겠다고 했다.
5분도 안되어 다시 전화가 왔다.
“아... 300만 원만 더 올려달라고 하시네요.”
이 게임 어디서 많이 해봤는데, 다시 시작인가? 매도자 장첸? 분명 집주인 분이 분명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라더니.
알고 보니 명의는 할아버지 집인데, 기력이 많이 없으셔서 큰아들이 실질적으로 거래를 주도하고 있었다.
500에 300 더 올려서 총 800만 원. 억 단위도 아니고 천 단위도 아닌데 이 정도면 천사나 다름없다고 여기자. 몇 백만 원단위로 부르는 것을 보면 매도자가 그리 간이 큰 거 같지도 않다. 남편과 나는 이번에도 서로 한번 쳐다보고 바로 콜을 날렸다.
아까는 5분도 안 돼서 콜백이 왔는데, 한참이 지나도 부동산에서 연락이 없었다. 실제로 오래 기다린 건지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간 건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또 올려달라고 하면 이번엔 어디까지 생각하시는지 대놓고 물어봐야지.'
'이러다 매물을 거두는 건 아니겠지?'
'제발 계좌번호 좀 주세요...'
그때 소장님에게 문자가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했는데, 계좌번호가 아니라 등기부등본이었다. 다행히 매물은 융자 하나 없이 깔끔한 매물이었다. 당연히 애초에 등본부터 확인했어야 하는 데, 정신없이 진행하다가 오히려 기본 중의 기본을 깜빡할 뻔했다.
다시 이번엔 계좌번호가 오길 계속 기다렸다.
5분, 10분... 띵똥
'예금주: 김천사, OO 은행 1212-3434-5656'
드디어 계좌번호를 받았다!
소장님은 잠시 송금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고, 그 사이 가계약금에 대한 계약서를 금방 만들어 보내주셨다. 간이 계약서에는 계약금, 중도금, 잔금에 대한 금액과 송금 일정이 나와있었다. 그리고 매수인, 매도인 어느 쪽이든 계약일 전 취소 시 가계약금에 대한 배액배상이 이루어진다는 조건도 함께 표기되어 있었다.
가계약금은 1천만 원. 우리는 더 많이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매도인이 거절했다. 많이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계약금도 1억 원으로 정해졌다. 이 역시 우리가 더 많은 금액을 걸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매도인은 최대한 적은 금액을 받고 싶다고 했다. 중도금을 내기 전까지는 배액배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도인은 여차하면 배액배상을 하기 위해 계약금을 적게 건 것이다.
매도인을 더 설득했다가는 혹시 마음이 바뀔까 봐, 우리는 간이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지체 없이 바로 가계약금을 보냈다. 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보내면서 이렇게 감사할 수 있다니.
"소장님, 저희 방금 매도인 계좌로 1천만 원 송금 완료했어요. 확인 요청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가 은행 앱을 안 쓰셔서, 은행에 직접 가서 확인하셔야 한다네요.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 은행 열면 아마 확인하실 거예요. 계약일은 이번 주 토요일 어떠냐고 물으시네요."
"저는 당장 내일도 가능한데요, 빨리 계약하고 싶은데 혹시 평일에는 안되시나요? 취소한다고 하실까봐 불안해서요."
"집 주인 할아버지께서 거동이 어려우신 가봐요. 아드님이 시골에서 차로 모시고 와야 해서 주말만 가능하다고 하시네요."
시골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직접 가서 계약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부동산 소장님은 그러면 매도인이 이상하게 느껴서 계약이 더 안될 수도 있다고 하시며, 이럴 때는 그냥 필요한 말만 하고 끝내는 편이 낫다고 조언하셨다.
하는 수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가계약금을 넣었고, 실제 계약은 오는 토요일이다. 제발 그 사이에 가계약금을 돌려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자.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긴 일주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