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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의 등장

장바구니 목록: 서울 집 (5년 전 담음)_20

by Posy 포지

부동산 시장이 심상치 않은 것은 굳이 뉴스로 접하지 않아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우리 역시 월세로 살고 있는 세입자인데, 현재 집주인은 이 집을 매매로 내놓은 상황이다.



슬금슬금 반응이 커지더니 9월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동산에서 집을 보겠다는 전화가 왔다. 주말은 당연했고, 평일에도 이틀 걸러 한 팀, 혹은 두 팀이 함께 집을 보러 오곤 했다.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과 관계가 좋다. 나이나 직장이 비슷한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몇몇 사건을 같이 겪으면서 가치관도 잘 맞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서로 친밀도가 높아진 특이한 케이스다.



그래서 집주인이 우리 집을 성공적으로 매도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집을 보여주고 있다. (남편은 모델하우스 가이드처럼 앞장서서 집 소개도 도맡아 한다.)



반면 우리 집에 사람이 많이 보러 올수록 나의 불안감은 더 커져갔다. 우리가 계약한 곳은 서울의 중심, 즉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연락이 훨씬 더 많을 터다.



가계약금을 이미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취소한다는 연락이 오면 어쩌지 맘졸이며, 매일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 사랑 아파트 상황을 살펴보았다.



‘제발 우리 계약이 끝날 때까지 높은 실거래가가 찍히지 마라..’



‘호가 높은 매물도 나오지 마라...’



혹여나 높은 금액으로 거래되는 매물을 보면 집주인 마음이 바뀔까봐 불안했다.



계약일까지 기다리는 그 며칠 사이에도 매물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가격이 낮은 것부터 차근차근,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매물들은 특히 더 빨리 없어졌다.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똑같나 보다.



이번엔 갑자기 새로운 매물이 올라왔다. 지금은 매물이 나오자마자 부동산 사이트에 올릴 새도 없이 채가는 시점인데 말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계약한 물건과 같은 동, 같은 평수인데 더 비싼 금액으로 올라온 것이다. 이제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우리가 계약한 물건인데…?



우리가 이미 가계약금을 냈기 때문에 해당 매물은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와 있으면 안 됐다. 그런데 이미 계약된 물건을 다른 부동산에서 업로드한 것이다. 그것도 더 비싼 금액으로.



우리는 뭔가 잘못됨을 감지했다. 남편은 곧바로 우리가 계약을 진행한 일잘알 부동산 소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소장님, 방금 네이버 부동산에 저희 물건이 올라온 것 같아요. 근데 기존 가격보다 더 높게 올라와 있어요. 이거 혹시 집주인 분이 저희랑 계약 파기하고 금액 높여서 다른 부동산이랑 진행하는 거예요?”



“네? 그럴 리가 없어요. 가계약금 넣고 나면 부동산끼리 어느 매물이 나갔는지 서로 알 수밖에 없거든요. 제가 확인해 보고 바로 전화드릴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 소장님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하, 정말 미치겠네요. ‘빌런 부동산’이라고 있는데, 장난치는 걸로 이 동네에서 유명해요.


그 빌런 부동산이 지금 집주인한테 전화해서 어느 부동산이랑 계약했냐고 엄청 물어봤대요. 그러다 안 알려주니까 마음대로 가격을 높여서 매물을 등록해놓은 거예요.


저기 매번 써먹는 수법이 저래요. 배액배상하더라도 남는 게 더 많으니까 저 가격에 내놓고 입질이 오면 나중에 집주인 꼬셔서 자기네들이랑 계약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제가 방금 집주인한테 슬쩍 물어봤는데, 심지어 집주인은 지금 저렇게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거 아예 모르세요.”



“아, 그러면 어떡하죠? 저희가 허위 매물로 신고라도 할까요?”



“일단 신경은 안 쓰셔도 될 것 같아요. 하도 당하다 보니까 이럴 때 쓰는 대처 방법이 있어요.”



가계약금 송금도 법적 효력이 있기 때문에 계약이 성사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계약이 된 순간 그 매물은 부동산 사이트에서 내리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올려져 있는 것도 내릴 판에, 심지어 계약된 매물을 다시 올리다니.



그것도 집주인과 상의도 없이 공인중개사가 임의의 가격으로 높여서 올렸다고 하니,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싶었다.



일잘알 부동산 소장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네이버부동산 시스템상 동일 매물을 여러 부동산에서 올리면 하나로 엮여서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때 어떤 부동산이 계약을 마친 후 ‘완료’ 처리를 하면, 다른 부동산에서도 그걸 완료로 처리해서 매물 전체가 내려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네이버 클린 시스템에서 해당 부동산이 새로운 매물을 등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한다.




SE-89E88688-AE20-4949-85ED-386753B1EB4B.png?type=w773 여러 부동산에서 동시에 등록해도 하나의 매물로 묶인다.




일잘알 부동산은 원래 네이버 부동산 사이트에 우리 매물을 올려놓지도 않았지만, 빌런 부동산이 올린 매물을 끌어내리기 위해 일부러 매물 등록을 진행했다.



그리고 해당 매물에 ‘계약 완료’ 처리를 해두었다. 그러니 빌런 부동산은 다음 날 새 매물을 업로드하기 위해서는 우리 계약 매물을 완료 처리하고 내렸어야 했다.


다행히 우리가 계약한 매물은 다음 날 부동산 사이트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일잘알 부동산 소장님은 세입자에게도 계약되었으니 아무에게도 집 보여주지 말라고 일러두었다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그 세입자는 평소에 집 좀 보여달라고 하면 답장을 안 하고 집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보여주지 말라는 부탁에는 바로 알겠다는 답장이 왔다고. 이 부동산 전장에서 세입자도 많이 힘들었겠다 싶었다.



다행히 우리가 계약했다고 하니, 우리에게 계약 당일 아침에 집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직 실물도 보지 못한 예비 우리 집,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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