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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불길한 예감

장바구니 목록: 서울 집 (5년 전 담음)_22

by Posy 포지

드디어 계약 날이다.



남편과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계약 약속 시간은 오후 2시였지만, 오전에는 세입자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집을 보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천천히 걷다가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오픈하는 10시에 맞춰 찾아갔다. 그리고 소장님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입자는 어린아이가 있는 신혼부부다. 아이를 안은 남자분이 문을 열어주셨다.



“안녕하세요, 주말 아침부터 방문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새로운 집 주인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새로운 집 주인’이라는 말이 낯설어 잠시 머뭇거리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배수관이나 보일러 같은 곳만 기록해두려 합니다. 물론 개인 물건은 안 나오게 찍겠습니다.”



우리는 집 구석구석을 천천히 살펴봤다. 혹시 모를 누수나 곰팡이 같은 하자가 있을지 확인하러 간 거였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했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또 인테리어를 새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이라 벽지나 바닥 모두 깨끗했다.



‘요즘 사람들은 집도 안보고 계약금 쏜다더라’에서 요즘 사람들을 맡고 있는 우리였는데, 실제로 둘러본 집의 컨디션이 좋아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소장님과 미리 약속한 대로 함께 계약서 특약 사항을 하나씩 검토하기로 했다.



우리가 요청했던 내용들이 대부분 반영되어 있었고, 별다른 수정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남편은 문장 표현 하나까지 꼼꼼히 읽어보며 세심하게 검토했다.



계약서 작성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것은 중개 수수료였다. 법적으로 상한 요율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매매가가 높다 보니 복비만 해도 꽤 큰돈을 내야 한다. 게다가 부가세 10%는 별도다.



우리는 이미 금액을 미리 계산해 봐서 알고 있었지만, 혹시 몰라 소장님께 한 번 더 직접 물어보았다.



"사장님, 중개 수수료는 얼마인가요?"



“정해져 있어요. 우리는 저기 저대로 받아요.”



그러면서 벽에 붙은 중개 보수 요율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협상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집이 10억이면 중개수수료로 500만원, 20억이면 1400만원을 내야한다.




남편과 나는 점심을 먹고 다시 오기로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우리 사장님한테 부가세만이라도 빼달라고 해볼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중개 보수는 그대로 진행하기로 합의 봤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조금이라도 깎아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혹여나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섰다. 처음 하는 집 계약이라 그런지 조금 긴장된 상태였고, 툭툭대는 말투로 남편에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그대로 하자. 돈 덜 들이면 나도 당연히 좋지. 그런데 괜히 사장님이 기분 상해서 문제 생겼을 때 매도인 편들면 어떡해? 얼마 안 되는 금액 깎으려다 나중에 큰 거 잃을 수도 있어."



"우리가 몇 백만 원 빼달라고 할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남편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당황했고, 우리는 말없이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밥을 먹는 동안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 상한 요율은 말 그대로 최대치일 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정이 아니다.


· 깎아달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일을 그르치게 할 사람이라면, 그게 오히려 문제인 것 아닌가. 그리고 소장님 성격상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분은 아닌 것 같다.


· 남편 말대로 물어봤는데도 안된다고 하면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거다. 되면 더 좋은 거고.



남편이 제안한 대로 물어보는 편이 여러모로 맞아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원래 계획한 시나리오에서 갑자기 변경이 생기니까 나도 예민해졌어. 미안해. 부동산 사장님한테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 빼주실 수 있는지 물어라도 보자."



"내 말 들어줘서 고마워. 내가 사무실 들어가서 말하고 올 테니까, 너는 카페에서 좀 쉬고 있어."



카페 테이블에 앉아 마지막으로 체크해야 할 것들을 살펴보고 있는 데, 남편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사장님이 기분 나빠하신 건 아니지?”



"전혀, 바로 오케이 하시던데. 얼마 생각하냐고 하시길래 부가세 정도만 빼달라고 했지."



그렇게 남편 덕분에 공돈을 벌었다.








계약 시간이 다 되어 부동산 사무실로 향했다. 매도인은 길이 많이 막힌다며, 조금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계약할 집의 명의는 할아버지 앞으로 되어 있었고, 실제 거래는 큰아들 부부가 주도하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 부부와 큰아들 부부, 총 네 분이 오실 예정이었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어려우셔서 큰아들이 모시고 와야 했다. 그래서 차를 두 대로 나눠서 큰아들은 할아버지 부부를 모시고 오고, 며느리는 부동산으로 곧장 오는 중이었다.



매도인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소장님과 전체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중도금이 지급되는 순간부터 계약은 취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혹시 모를 변심에 대비해 우리는 중도금 일정을 최대한 앞당겨 진행하고 싶었다. 잔금일은 오히려 늦추는 게 좋았지만, 그러면 너무 속 보일까 해서 중도금 기준 2개월 뒤로 요청해두었다.



20분쯤 지났을까, 아주머니 한 분이 숨을 헐떡이며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기 주차장이 왜 이렇게 멀어요? 한참을 걸어왔네~”



“아 여기 아파트 상가에 주차하시면 저희가 그냥 등록해드리는데, 얼른 앉으세요.”



매도인 일행 중 며느리 쪽이 먼저 도착한 거였다. 다른 가족들을 기다리는 동안 소장님은 냉장고에서 비타 500을 꺼내며 말을 건넸다.



“사모님, 중도금은 추석 전으로 하고, 잔금은 두 달 뒤쯤 하는 거 괜찮으시죠? 사모님은 집 얼른 정리하시는 게 좋고, 우리 신혼부부는 새집 빨리 생기면 좋잖아요, 호호.”



“아뇨, 그렇게 빨리는 안 받고 싶은데요.”



이 집을 계약할 때부터 들었던 말이 있다.



‘가계약금은 많이 받고 싶지 않다’, ‘계약금도 최대한 적게 받고 싶다’, 그리고 오늘은 ‘중도금도 일찍 받고 싶지 않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이 계약, 과연 끝까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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