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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연

왠지 불길한 예감장바구니 목록: 서울 집 (5년 전 담음)_23

by Posy 포지


뒤이어 아주머니가 말한 이유는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아버님 계좌에 미리 돈이 들어가 있는 건 좀 그래요.”



“왜요? 돈 빨리 받으시는 게 더 좋지 않나요?”



“뭐 시누들이 건드릴 수도 있고요.”



그제야 사정을 이해했다. 매도인 할아버지에겐 세 자녀가 있었다. 첫째인 큰아들과 둘째 딸, 셋째 딸. 할아버지 건강이 악화되기 전에 재산 정리를 위해 집을 파는 중이었다.



계약은 큰아들 부부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며느리는 시댁 자금이 딸들에게 미리 흘러갈까 봐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중도금 일정은 추석 지내고 수요일쯤으로 해요. 명절 때 뭐 어떻게 나눌지 친척들 만나서 의논도 좀 하게요.“



2025년 추석은 최장 10일짜리 황금연휴였다. 연휴가 길다는 건, 그만큼 변수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는 시기엔 주변 한마디가 사람 마음을 쉽게 흔들어 놓는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보면, 괜히 팔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이 시세에 파는 건 아깝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더 받을 수 있다’ 같은 말들.



나는 연휴 사이에 혹시 집주인 마음이 바뀌어서 집을 안 판다고 하면 어쩌나 마음 졸이기 싫어서, 차라리 추석 전에 중도금을 내버리고 싶었다. 중도금을 내면 계약을 파기할 수 없으니, 비로소 안심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장님은 염려 가득한 얼굴로 우리에게 괜찮겠냐고 물으셨다. 괜찮지 않았지만 떨떠름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매수자 입장에서 돈을 더 빨리 주겠다고 하면 괜히 조급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중도금을 빨리 받고 싶지 않은 이유가 ‘시누들이 돈을 건드릴까 봐’라는 걸 알고 나니, 배액 배상 같은 문제는 아니란 생각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output%EF%BC%BF357729712.jpg?type=w773 내년에는 없다는 황금연휴




잠시 후 큰아들과 할아버지 부부가 들어오셨다. 할아버지는 혼자 걷기 힘드셔서 큰 아들이 부축하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여리디 여려 보이시는 할머니가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계셨다.



부동산 안 테이블은 작지 않았지만, 모두가 앉기엔 비좁았다. 할아버지는 매도인으로 내 맞은편에 앉으셨고, 큰아들 대신 며느리가 그 옆자리를 지켰다. 역시 이 집의 실세는 며느리였다.



"자 계약 진행하겠습니다."



소장님이 계약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며 설명했다. 우리가 미리 적어두었던 특약 사항도 모두 낭독했는데, 다행히 매도인 측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동의했으니 이제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할 차례다. 매도인, 매수인, 공인중개사 순으로 총 세 개의 문서에 수기로 이름을 적은 뒤 도장을 찍었어야 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 옆에서 어디에 이름을 적어야 하는지 종이를 집어가며 알려주었다. 매도인 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이름을 쓰셨다. 한참이 걸리셨지만, 정자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셨다. 몸이 아파 손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아마 가족들을 위해 평생 지켜온 집을 내놓으시는 거겠지.



그 사이에 뒤쪽 소파에 계시던 할머니가 계약 과정이 궁금해하셨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지켜보셨다.



내가 "할머니 같이 보시겠어요? 제가 의자 들고 올까요?"라고 여쭤봤는데, 할머니는 소녀같이 수줍게 웃으시며 "아니에요, 난 봐도 몰라요."라고 답하셨다.



내가 먼저 말을 건 다음부터 할머니는 금세 말씀을 이어가셨다.



"이 집에 들어가 봤어요? 우리 딸 자랑하는 건 아닌 데 우리 딸이 인테리어를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요. 예쁘게 해놨어요.”



"네 할머니, 아침에 봤는데 진짜 예쁘더라고요. 집이 안 그래도 환한데 인테리어까지 밝은색으로 해서 너무 좋았어요."



"우리가 이 동네에 오래 살았어요. 애들도 다 이 동네에 학교 나왔어요. 나는 아직 여기가 좋아서 집 안 팔고 싶은데..."



말끝이 떨리더니 할머니가 훌쩍이기 시작했고, 순간 모두가 당황했다. 부동산 소장님은 프로답게 재빨리 분위기를 바꿨다.



"어머님, 이제 그 소중한 집은 이제 이 예쁜 신혼부부가 더 가꾸면서 살 거예요. 젊은 부부한테 가는 게 얼마나 좋아요. 제가 오래 일해보니까 집도 다 주인이 있더라고요."



큰아들은 웃으며 “우리 어머니 또 우신다, 좋은 날인데 왜 울어요”라고 말했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할머니가 웃으며 동네 얘기와 집 자랑을 하실 때까진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가가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셨다. 오랜 세월 정든 집을 떠난다는 아쉬움이 그만큼 크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눈물을 보니 나도 울컥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같이 울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게 뻔해서, 눈물만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애써 웃었다.



할머니의 동네 자랑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서, 큰아들 아저씨도 신이 나서 어린 시절 추억들을 꺼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 하나에 이렇게 많은 감정과 사연이 섞여있구나.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 채 계약서에 오래도록 천천히 이름을 쓰시던 할아버지,

부동산에 나와 생경한 풍경에 신이 나셨다가도, 막상 집을 판다는 현실에 눈시울이 붉어진 할머니,

집을 팔아야 하면서도 돈이 시누에게 들어갈까 걱정하는 며느리,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동생들 사이에서 집안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아저씨까지.



같은 자리에 있어도, 마음의 방향은 모두 달랐다. 그날의 계약은 그렇게 여러 사람의 사정이 얽혀 완성됐다.



잠시후 며느리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벌써 집을 산대요. 우리는 한참 있다가 샀었는데."



칭찬해 주시는 건 좋지만, 괜히 젊은 사람들이 집 사는 게 또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약간 우는소리를 했다.



“저희 외식도 줄이고, 도시락 싸 다니면서 모았어요. 집에 있는 물건들 당근에 내놓고 팔고요."



남편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우리 와이프가 진짜 알뜰해요. 냉장고에 있는 재료 하나하나 따져보고 메뉴 짜요. 장 볼 때도 이마트랑 마켓 컬리랑 가격 비교해서 사고요."



며느리와 부동산 소장님은 순식간에 아줌마 모드로 돌입해서 남편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이고 장가 너무 잘 갔다~ 요즘 젊은 사람들 집에서 밥도 안 해 먹는데 어디서 이런 색시를 구했대~"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서 우리는 미리 준비해둔 케이크를 꺼냈다. 그리고 매도인 가족분들과 부동산 소장님께 선물로 드렸다.



"별건 아니지만 이렇게 좋은 집 주시는 게 너무 감사해서요. 여기 케이크 되게 맛있어요. 두 집에서 따로 오실 줄 알았으면 저희가 하나 더 사 왔을 텐데.."



"또 이렇게 예쁜 케이크는 어디서 사 온 거예요? 어머님, 이런 매수인 없어요. 집 잘 파시는 거 맞죠?"



부동산 소장님의 말에 할머니는 웃으셨다. 그리고 케이크가 든 종이봉투를 받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케이크는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걱정도 긴장도 많았지만, 나의 첫 집 계약은 그렇게 다행스럽게 따뜻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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