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파스텔을 처음 접한 건 엄마의 책상이었다.
우리 엄마는 취미가 많았는데 배우기에 겁이 없기도, 손재주가 좋기도 했기 때문이다.
딸과 엄마의 운명은 어느 정도 같다던데. 나도 이렇게 취미 부자를 꿈꾸고 있다.
뚜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취업 준비를 하면서인가.
한동안 오일파스텔이 유행이었다.
유튜브에선 감성 ost를 깔고 오일파스텔로 오브제를 그리는 영상이 인.급.동이었으며 인스타에도 오일파스텔 그림이 슬슬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 유행은 기시감이 있었는데 바로 어렸을 때
투니버스 채널 광고에 나오던 파스넷과
비슷한 질감과 느낌이었다.
하루는 내가 쓰던 일기장에
오일파스텔로 아보카도를 그려봤다.
미끌미끌한 질감은 종이 표면을 타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들러붙어 번지기도 했다.
오일파스텔을 색마다 쓰다 보면
그들의 경계는 투박하기도 하고 번지기도 하는데
완성하면 독특한 오일파스텔만의 무드가 살아난다.
취미 찾기 에세이를 써보기로 마음먹으면서 가장 먼저 찾은 건 오일파스텔 수업이었다. 일기 모퉁이 한 칸에 그리던 어설픈 아보카도가 아닌, 오일파스텔만의 멋을 살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우리 집과의 인접성, 작업 공간의 쾌적함, 수업의 자율성을 따져가며 클래스를 골랐다.
그리고 싶은 그림도 2-3개 찾아갔지만 아쉽게도 1시간짜리의 초보 클래스라
정해진 소재 안에서 수업은 진행됐다.
오일파스텔로 먼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색연필 혹은 연필로 그리고 싶은 소재의 테두리를 딴다.
어떤 색깔을 활용할지 소재의 색깔을 기반으로 몇 가지 오일파스텔을 고르고 테스트한다.
기존 연습장 말고 진짜 도화지에 테두리를 그리기 시작한다.
테두리 안에 주요 배경색을 입힌다.
핵심이 되는 색상은 손으로 문지르거나 두껍게 얹어서 질감을 살린다.
물론 선 없이 색깔들을 점묘화처럼 구성하여 배경을 그리는 경우엔 테두리를 그리는 과정은 생략한다.
내가 고른 재료는 케이크와 오렌지, 즉 정물화였기 때문에 철저한 연습 과정을 거쳤다.
오렌지의 경우에는 과일의 명도와 빛 등 색깔의 경계를 없애고 마치 물감의 느낌으로 색감을 살려야 했다.
반면 케이크의 경우 꾸덕한 질감을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작업은 작은 물감 칼로 오일파스텔의 일부를 잘라내어
마치 페인트처럼 얹는 것이었다. 이건 케이크 크림의 질감을 따라 하는 것인데
색을 올릴 때마다 군침이 돌 정도로 실제 케이크 질감과 비슷했다.
처음엔 케이크의 테두리도, 배경 색도 투박하기 그지없어서 망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크릴 칼로 조금씩 색을 얹으면서 어느새 2D와 3D 경계선에 있는 케이크로 거듭났다.
오일파스텔의 여러 기법은 사실 우리 삶과 비슷하다.
우린 각자의 색을 번지게 하며 다른 구성원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경계선 하나 없이 번지는 순간 어떤 대상을 그리려 했는지 잃어버린다.
어떤 색을 강조할지 정물의 본질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가장 적당한 색으로 적당한 두께감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힘을 주고 너무 두껍게 색을 쌓아 올리면 그림은 투박하게 미완성으로 남는다.
참 어렵다. 너무 번진 삶은 결국 본질을 잃고
너무 두껍게 쌓아 올린 삶은 결국 다른 색들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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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취미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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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