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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만 태국 요리사로 살아보기

삶이란 옷이 갑갑하다면

by 네버마인드

눈으로 보는 즐거움, 사진으로 아쉬움 없이 잘 담는 것,

많이 걸어서 부은 다리, 시행착오로 찾아가는 명소


내가 아는 여행은 여기까지였다.

치앙마이 요리 클래스에 참여하기 전까진.


요리를 배우는 장소는 픽업 장소로부터

약 40분가량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픽업 장소에 서 있으면 봉고차에 미리 탄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미 앉아서 실려온다. 낯선 이들과 갑자기 같은 공간에 속한다는 것은 약간의 긴장감과 거북함을 주지만 이내 익숙해져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우리는 먼저 가이드 선생님과 마을 시장에 들렀다.

이건 수업에 포함된 코스인데 가이드이자 오늘의 요리 선생님은 유창한 영어와 귀여운 태국어를 섞어 과일과 재료들을 설명해 주셨다. 예를 들어 Spicy 캅~은 매운 재료란 뜻이었다.


한참을 달려 들어간 수업 장소는 말 그대로 지상낙원이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 요리 장소 2곳과 식사 장소 2곳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었으며

모든 공간이 뻥 뚫려있어 그 더운 날씨임에도 답답함 한 점 없었다.


현지 식재료를 마트에서 눈으로 구경했으면, 요리에 쓸 식재료는 직접 밭과 양계장에서 만지며 체험할 수 있었다. 밭은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쨍한 햇빛 아래 바나나 밭과 야자수, 그리고 각종 뿌리채소들이 즐비했다.

30도가 넘는 온도와 눈 한번 뜨지 못하는 격한 햇빛에도 이 밭에서 주는 해방감은 그 어느 한국 겨울보다 시원했다.

양계장에선 자유롭게 닭을 구경하고 닭의 엉덩이가 방금 스쳐지나간 계란도 만져볼 수 있었다.

종이팩에 담긴 계란만 보다가 직접 따끈한 계란알을 만져 본 것은 내 평생 겪어보지 못한 충격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서 죄책감이 밀려왔다. 계란프라이의 운명으로 결정된 계란만 보다가 따뜻한 온도의 알은 생경하게 느껴졌다.

1교시는 팟타이.

팜유, 계란, 쌀국수 면, 태국 고추, 카피르라임 잎, 고수, 새우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재료들로 팟타이의 정석 요리법을 배웠다. 1년도 전에 배운 수업이라 자세한 순서는 애석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볶는 과정에서 이렇게나 팜유를 많이 쓴다는 점에서 놀란 감정만 기억이 난다.


2교시는 똠양꿍.

코코넛 밀크, 고추, 칠리 페스토, 카피르라임잎, 고수, 레몬그라스, 새우 등 꽤 많은 재료가 들어간다.

팟타이와 똠양꿍에서 모두 등장하는 사소한 킥은 바로 카피르라임이다.

이 라임은 좀 덜 신 맛인데 라임 잎을 태국 요리에 넣으면 특유의 깊은 향을 낸다.

새우를 까먹고 손 씻는 물그릇에 카피르라임 한 조각을 넣는다고도 한다. 향이 일반 라임보다 더 진하다.

어느 정도냐면 한국에 귀국하는 순간까지도 내 옆에 남아 있으리라 약속하는 듯한 진한 감귤향이 났다.


약 2시간의 요리 수업이 가이드 선생님의 진두지휘 아래 끝이 났다. 사실 코코넛 오일이 타닥타닥 팬 위에서 뛰쳐나오고 코코넛 밀크가 보글보글 성을 내면 정신없이 재료를 넣기 바빠서 어떻게 요리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요리를 마치면 오두막 같은 식사 공간에서 망고밥과 함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모든 재료의 양, 넣는 순서마저 수업에서 정해준 것과 다름없지만. 어쨌든 내 손에서 이런 요리의 형태가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다.


관광만으로 채웠던 4일보다 요리를 배운 5시간 동안 태국이란 나라에 더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나는 취준생일 때 집에서 혼자 간단한 요리를 하곤 했지만 해외에서 요리를 배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마트에 모든 운명을 맡긴 채 진열된 재료를 고르는 방식과 달리 이제 막 낯선 땅에 태어나 성숙해지기 시작하는 재료를 직접 만지고 고른다는 것은 식사의 의미를 넘어 내가 자연 한 구석에 속한다는 ‘귀속감’마저 느끼게 했다. 또한 해외에서 배우는 요리란 단순히 여행을 넘어 그들의 삶을 빌리는 것이었다.


여행만으로 씻을 수 없는 권태가 있다.

멋진 건물과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내 일상에서의 땟국물을 뺄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문화의 삶을 잠깐 입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해요

관광만 하는 해외여행이 지겹다면

내 삶의 반경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도시가 지겹다면


이 취미, 특히 좋아요

현지 재료로 요리를 해보고 싶다면

평소에 다른 문화에 관심이 많다면

먹는 걸 좋아한다면



나는 이 취미를 통해
낯선 자연 속에서 아늑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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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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