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독립적으로 자랐다는 말의 양면
내가 묻어두고 없는 것으로 여겼던 상처를 인지하는 것이 첫 상담 치료의 주된 결실이었다면 어린 내가 인간에게 가졌던 분노와 원망을 인지하게 된 것이 두 번째 상담 치료의 주된 결실이었다.
부모님은 금슬 좋은 부부였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인생이 중요했다. 부부가 연인으로서 사이가 좋으면 자녀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획득하며 충분한 정서적 발달을 이룰 수 있다. 난 내 부모님이 그 좋은 예시라 생각한다.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을 깊이 사랑해주었으며 많은 것들을 해주었지만 함부로 통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삶에서 많은 것들을 내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많은 선택들을 온전히 나의 의사로 해냈고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었다. 난 자랑스럽게 상담 선생님께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통제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하게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안전한 보호 없이 방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나는 부모님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이상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두 번째 상담 치료 과정 중에 알게 되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해도 그렇게 떨어지는 성적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적이 빠르게 떨어졌다. 노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성적을 받기 어려운 고등학교 내신 시험에서 나는 죽을 쒔고 고 1 마지막에 전교에서 중간쯤 되는 성적을 받았다(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그래도 상위 15%는 되었던 중학교 시절에 비해 급작스러운 하락이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특별히 예체능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얼굴 같은 외적인 조건으로 돈을 벌 정도도 되지 못했다.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성인이 되면 나는 혼자, 스스로 온전히 살아내야 했다. 나는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공부하는 습관을 들였다.
머리가 좋은 덕에 그렇게 마음먹고 나서 바로 전교 1등을 했다. 이후에도 항상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이었고 수능 때는 학교 1등을 하고 대학에 합격했다. 내가 알아서 공부하고 시험을 봤고 대학 원서도 내가 직접 작성해서 결제까지 했다. 다른 집은 자녀가 고3일 때 부모들이 정보 전쟁을 한다고 수험생 당사자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내 부모님은 내가 고3 때 오히려 여행을 다니며 여유롭게 살았다. 학원도 거의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비로 부담을 가질 것도 없었다.
나는 수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자율 신경계 장애를 얻고 해골처럼 말라버렸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려 했다. 대학에 가서도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생활비를 내가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학원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해서 부모님께 한 번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등록금은 부모님이 내주셨다). 대학생이 되어 나는 누군가 날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드디어 공고히 할 수 있었고 1학년으로서 할 수 있는 많은 활동들에 참여하며 ‘인싸’가 되었다. 하지만 노는 데도 돈이 필요했고 스스로 벌어 살던 나는 돈이 없어 친구들이 노는 자리에 끼지 못하거나 학교에서 밥을 굶는 일도 많았다. 옷을 살 돈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옷을 매일 돌려 입는 패션 센스 제로의 대학생으로 불렸다. 센스가 없는 것도 맞았지만 옷을 살 돈이 없었던 것도 있었다. 동아리를 하며 선물을 교환하는 시기에 동아리 부원들이 모두 십시일반해 내게 더 다양하게 돌려입으라고 색색깔 티셔츠를 여러 장 사주기까지 했다.
나 스스로 해내는 것.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집이 못살지도 않았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집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나중에 엄마한테 ‘나 그때 내가 벌어 다니려고 너무 고생했었어’ 라고 하자 엄마는 ‘누가 그러랬어?’라 말했고 나는 어이없이 웃어버렸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홀로 오롯하게 서려고 노력했을까. 그것도 결국 과거의 시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내 학교 폭력 이야기를 모두 듣고 상담 선생님은 그 당시의 내가 너무 불쌍하다며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부재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탁, 하고 불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맞다. 나는 살면서 어느 누구도 믿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주변 학급 학생 어느 누구도 날 돕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며 괴로움을 호소해도 아무도 날 달래주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담임 교사도 부모님도 자신의 영역에 내가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날 내쫓거나 내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집에서도 내 영역은 침해당하고 부서졌으며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해선 안 된다고 나 스스로에게 고통스럽게 각인시켰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던 나는 모든 것을 홀로 해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모든 것을 혼자 해냈고 대학교에 가서도 부모님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 남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다 지쳐빠져서 회복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인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과 우리 가정을 이상화하는 방어 기제로 날 감쌌다. 그러나 실제로는 힘들었다고, 그 모든 과정이 외로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20대 초반에 한 번 폭발해버린 적이 있다. 정신과를 다닌 지 얼마되지 않았고 우울증이라고 집에 말한 뒤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갑자기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고 나는 집에서 울며 가족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했다. ‘당한 건 난데 왜 나한테 뭐라고 해‘ 라고 했던 것이 기억 난다. 집에서는 내가 공익근무를 하며 근무지에서 힘든 일이 있었는지 염려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내 몸에 10살의 내가 빙의해 외친 것이었다. 오래 눌러 두고 있던 독 안에서 부패한 상처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뚜껑을 비집고 흘러나온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어필하며 혼자 일하고 학교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위하듯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것을 수용해주지 않았고 나는 ‘학부모들 앞에서 비굴하게 개처럼 일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했으며 아빠의 말에 의하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엄마는 속상해서 울었다고 한다.
모든 것은 내 내면 아이가 괴로움에 소리치는 것이었다. 내가 힘들 때 난 혼자였어요. 왜 날 도와주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내가 잘못했다고 하나요. 당신들 때문에 난 죽고 싶어요.
지금도 죽지 않기 위해 병원에 다니고 상담 치료를 받으며 계속해서 나를 달랜다. 말 그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왜 내 인생에는 그런 고난이 많았으며 나는 홀로 방치되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만 두었다. 이유 없는 것에 이유를 붙이려고 하면 비참해진다. 아직도 나는 내 삶을 지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나뿐이라는 생각에 가끔 허무해진다. 죽을 수 없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의 존재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받을 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 그건 내게 유용한 브레이크이지만 동시에 부모님을 장애물처럼 여기게 만든다. 어쩌면 모든 치료의 목적 중 하나는 살기 위한 것 이외에도 부모님을 올바르게 사랑하고 싶은 내 내면 아이의 바람이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