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추상적 감정을 감각으로 묘사하기
버스에서 내리니 정류장 앞은 늦은 시각까지 열려있는 가게의 불빛으로 환했다. 학교에서 10시까지 야간 자습을 하고 온 길이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길을 지나 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컴컴한 오르막길을 올려다본다. 길 왼쪽은 초등학교, 오른쪽은 중고등학교라 양쪽으로 담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한밤의 학교는 불빛이라고는 없어 높은 담장 안에서는 침묵만이 전해졌다. 골목은 달이라도 뜨지 않으면 너무 깜깜했다. 얼마 전에야 여러 차례에 걸친 주민들의 건의로 가로등 몇 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가로등 불빛은 미약하여 꽤 넓은 골목 안은 여전히 밝은 곳보다 어두운 부분이 많다.
골목 앞에서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신다. 후, 내쉬며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골목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습을 마치고 같은 버스를 타고 온 학생이 한두 명 있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 없다.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애가 탈 것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한 밤길에 다른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좋다. 사람이 없을 때 더 안심된다. 오늘 밤도 이대로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좋겠다.
골목길을 삼 분의 일쯤 올라갔을 때 멀리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공간을 차지하는 부피로 보아 남자임이 분명하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누구일까? 괜찮을까? 그냥 지나가겠지?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관찰해 보니 남자의 걸음걸이가 똑바르지 않다. 흔들리고 비틀거리기도 한다. 술 취한 사람? 아, 저 몸으로 부딪쳐 오면 어쩌지? 아무 일 없이 지나칠 수 있을까? 남자와 점점 가까워진다. 갑자기 삐이익, 하는 새 소리가 담장 안에서 들려 왔다. 나뭇가지에 있던 새가 나에게 경고라도 하는 걸까? 나는 저 남자를 무사히 통과하는 게 목표인데.
내가 들어갈 오른쪽으로 빠지는 좁은 골목까지는 좀 더 가야 한다. 거기서 한 집 건너 친구네 집이 있다. 여차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거기까지만 잘 갔으면, 바라며 잘 떼어지지 않는 발을 가까스로 하나씩 들어 앞으로 옮긴다. 뚫어질 듯 남자를 주시하며.
남자와 대여섯 발걸음만큼 가까워진 순간 남자가 한쪽 팔을 들어 올린다. 헉, 숨이 막힌다. 왜? 뭐 하려고?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눈을 부릅뜨고 남자의 얼굴과 손을 본다. 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필요하면 재빠르게 도망갈 수 있을까?
팔을 올린 건 나에게 말을 걸겠다는 뜻인가? 이 시간, 이 어두운 장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아무 말도 나누고 싶지 않다. 제발 말 걸지 말았으면, 간절하게 빈다.
두 발짝 앞에 오자 시큼한 술 냄새가 났다. 가슴이 죄어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떨리는 발을 내딛는데 그에게서 돌연 ‘학생, 이리…’ 하는 컬컬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오자 내 입에서 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나는 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비켜 앞으로 튀어 나갔다. ‘가면...’ 하는 소리가 귓바퀴를 따라왔다. 남자가 돌아서 내 어깨를 낚아챌까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숨이 턱에 닿았지만 골목으로 쑥 들어가서 또 한 번 꺾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 뛰는 발소리에 어디서 컹컹 개가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