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옆에 선생님

by 가을산

관공서에 볼일 보러 온 사람에게 직원이 ‘아줌마’라고 하여 잦은 시비가 일었다. 뭔가를 빠뜨리고 가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아줌마!’ 하는 건 그렇다 쳐도 딱하고 답답하다는 듯, 무식쟁이 여편네라는 느낌을 실어서 하는 ‘아줌마’라는 말에 꼭지가 돌았다, 뚜껑이 열렸다,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하도 분쟁이 많아 지침이 내렸는지 어느 때부터 민원인이 남자면 무조건 선생님, 여자면 사모님이라 불렀다. 현직 여교사는 자신은 선생님인데 선생님의 부인을 일컫는 ‘사모님’이라 부르니 기분이 좋지 않다 하고 그런 식의 호칭이 남녀차별이라는 의견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결국 다시 지침이 내렸는지 남녀 민원인 모두 선생님으로 통일되었다. 동사무소나 구청에서도 선생님이라 부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파트의 관리사무소 직원마저 그렇게 불렀다. 집의 난방에 관해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짧은 통화에 몇 번이나 선생님, 선생님, 하니 듣기가 불편했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전 첫 아이를 낳았을 때다. 그날따라 산모가 많아 입원실이 부족해 병실 바깥 복도에 침대를 내놓고 누워 있었다. 보호자가 있을 곳이 없어 시어머니와 남편은 넓은 대기실에 가 있으라고 했다.

한밤에 혼자 있을 때 간호사를 부를 일이 있었는데 병원에 입원한 게 처음이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어른들이 부르던 말이 생각나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아가씨!’ 하고 불렀더니 못 들었는지 대답도 없고 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왔으니 못 들은 건 아니었다. 와서는 처치하고 나서 ‘다방 아가씨 아니니까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세요.’ 했다. 아픈 사람에게 너무도 쌀쌀한 말투였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돼요?’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알아서 올 때까지 부르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은 뭐라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퇴원 후, 투병으로 병원 출입이 잦은 시누이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선생님이라 불러야 잘해준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자존감과 자부심을 올려주는 호칭인가? 나는 부담스럽기만 한데. 의사도, 간호사도, 원무과 직원도 모두가 선생님이란다. 민원인으로는 나도 선생님이라니 선생님이 넘쳐난다.

자신이 선생님이라는 의식이 확고하면 자기 외의 사람은 다 가르쳐야 할 학생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면 교화 대상은 즐겁지 않을 테다.


무언가를 배우러 갔더니 가르치는 선생님이 배우는 학생에게도 선생님이라고 했다. 나이 지긋한 수강생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예의가 아니라 여겼는지 ‘먼저 난 자’라는 ‘선생’의 원래 뜻에 맞춘 건지. 그런데 배우는 학생들끼리도 서로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자기보다 연상인 사람을 듣기 좋게 선생님이라 하는 모양인데 일일이 나이를 물어 따질 수도 없으니 다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도나도 선생님이라 하니 좀 정신이 없고 선생님의 가치가 떨어진 듯했다.


나이가 확실히 적어 보이는 수강생에게도 똑같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걸 보다가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어떤 방면에서는 그보다 못한 사람의 선생님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도 다른 시간에는 학생으로서 무언가를 배웠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에게 컴퓨터 방면에서 선생님이다. 휴대전화나 가전제품 활용에도 선생님이다. 공인된 기관에서 요가, 서예, 드럼 같은 강좌를 맡아 가르치지 않더라도 우리 옆에는 어떤 부문에서 보고 배울 만한 선생님이 많다.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께 배운 것도 얼마나 많은가. 그분들도 좋은 선생님이다.

나도 요리 선생님은 못 되어도 설거지 부문의 선생님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잘나지 않아도 꿋꿋이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도. 정리 분야에서도 자식에게만은 선생님이 될 만하다고 자부한다. 수영 선생님, 테니스 선생님, 하듯 ‘선생님’ 앞에 생략된 종목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절전) 선생님, (환경 보호) 선생님, (맞춤법) 선생님, (혼자 잘 노는) 선생님.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대한 부담감이 좀 덜어지지 않는가?


이모가 많다. 음식점에도, 목욕탕에도 이모가 있고 어린아이 등, 하원이나 등, 하교를 도와주는 사람도, 낮 동안 아기를 돌봐주는 사람도 이모다. 웬 이모가 이렇게 많은가? 단군의 자손이라 하면 한 핏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전 국민의 가족화는 이상하다.

밥 먹으러 가면 ‘이모, 여기 상추 좀 더 주세요’ 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나는 이모나 고모가 없어서인지 그 말이 잘 안 나와 여기요, 하는데 그러면 안 되나 싶어 괜히 움츠러든다. 듣는 사람이 오래전 그 간호사처럼 ‘저는 물건이나 장소가 아니니까 여기, 저기 하지 마세요’ 할까 봐 웬만하면 부르지 않는다.

진짜 이모와 각별해서 속으로 ‘이모도 아닌데’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왜 친척도 아닌 타인을 이모라 부를까? 우리 민족이 정이 많아서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도 조카처럼 생각해 나물 한 접시나 국 한 국자라도 더 주고 더 친절하게 대할 거라 기대해서는 아닐까?

어린아이를 봐주는 사람에게 이모라 하는 것도 그 아이를 혈육처럼 생각해 주길 바라서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대개 이름에 맞게 행동하려 한다. 엄마라 불리면 힘들어도 엄마의 역할을 해내듯 이모라 불리면 이모처럼 해야 할 것 같다. 이모, 이모, 하는 아이에게 냉정하기는 어려울 테다.

이모라 불리면 속으로 ‘내가 왜 저희 이모야? 우리 조카는 얼마나 예쁜데’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부르는 데야 어쩌랴?


여자는 이모라 부르지만 같은 일 하는 남자를 삼촌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경상도에서 ‘아지야’라 하는 건 보았다. ‘아지야’는 아재나 아저씨라 부르기에는 과한 젊은 남자를 귀엽게 부르는 말이다. 어린 삼촌에게도 쓰는 말이니 이 또한 식구 같은 느낌이다. ‘매니저님’보다는 듣기 좋다. 그 외에는 별다른 호칭이 없는 것 같으니 그에게는 자신 있게 ‘여기요’ 해도 될까?

지하상가나 시장의 옷 가게 앞을 지나가면 상인들이 ‘언니 이것 좀 보고 가. 언니 이거 예뻐’ 하고 옷깃을 잡는다. 젊었을 때도 나이든 지금도 왜 언니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다. 캄보디아에 갔더니 조악한 팔찌를 파는 아이들이 ‘언니’, ‘예뻐’, ‘싸요’라는 한국어를 연발했다. ‘언니’가 장사하는 데 필수적인 단어라고 듣고 배웠을까? ‘언니’도 ‘이모’처럼 가족 같은 정에 호소하여 매정하게 내치지 말라고 쓰는 말인 듯하다.


학교나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 선생님이라 한다.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은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이모라 한다. 아파트나 건물에서 청소하는 사람에게는 선생님이라고도 이모라고도 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아줌마, 라고 부른다. 이런저런 서비스업 종사자를 다 이모라 하는데 그들에게는 왜 이모라 하지 않는가? 우리 민족은 정이 많다며?

왜 그 흔한 선생님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병에 걸리면 의사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며 살려달라고 매달리는데 그들에게는 그런 절박한 도움이나 어묵볶음 한 접시 같은 이익이라도 얻을 게 없어서는 아닐까? 그들도 청소와 또 다른 방면의 선생님이 될 만한 연륜이 있으니 선생님이라 부르면 어떻겠는가? 아니면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 여성이든 차별 없이 공평하게 ‘아주머니’라 하든가.


호칭이 참 어렵다. 선생님, 사모님, 여사님, 같은 말이 거품처럼 부풀어 퍼진 이유일 테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누구에게나 두루 쓸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종 대왕은 황무지에서 한글도 만드셨으니 알맞은 말을 창안하거나 찾아내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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