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고통은 나눌 수 있을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리뷰 上

by 조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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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필매거진'에 기고했던 글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업로드함을 밝힙니다.

https://cms.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628


*본문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소설판과 영화판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설판과 영화판에서 전개가 다른 부분은 영화판의 전개를 기준으로 서술합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인용구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소설판 혹은 영화판의 문장 혹은 대사에서 발췌해온 것들입니다.


낯선 세계의 원리: 균형의 재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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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스스로 균형 잡힌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균형이 무너지고 ‘불균형’의 상태에 접어드는 순간, 세계는 곧바로 새로운 균형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계의 구성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다시 정립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이윽고 그러한 재정립의 흐름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의 균형 회복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성원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 둘 중 하나이다. 첫째, 균형이 붕괴된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그 충격이 개별 구성원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 둘째, 해당 구성원이 그 붕괴를 받아들이고 소화할 만큼의 성숙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을 때다. 그런데,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나오는 청소년들에게는 이 두 가지 경우 모두가 해당된다.


어머니의 이혼 및 재혼으로 갑작스럽게 양아버지, 그리고 배다른 동생과 같이 살게 된 청소년 '하스미 유이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춘기를 맞이한다. 새로 중학교에 입학하고, 검도부에 들어가는 등 새로운 환경 속에 놓인 하스미에게는 아직 주변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그런 하스미에게도 크게 의지가 되는 대상이 한 명 있다. 바로, '호시노 슈스케' 이다. 호시노는 공부와 운동 모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생으로, 하스미는 호시노를 중심으로 모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된다. 순탄하게 이어질것만 같던 그들의 세계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균형을 잃게 된다. 이 균형의 상실이, 세계의 구성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게 되리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붕괴, 갑작스러운 변화

3mcNt4Hes8J0A7Stk6rwbRQWxbA.jpg 우리에게는 낙원처럼 보여도 자연 속 생물들에게는 지옥일지도 몰라. 자연이란 그런거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방학을 맞이해 하스미와 호시노, 그리고 몇 명의 아이들은 오키나와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호시노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의 모습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스스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여행에 동행하던 남자 한 명이 죽음을 맞는다. 더군다나 여행 전후로 아버지의 공장이 부도가 나고, 그에 따라 가정마저 파탄나는 지경에 이른다. 이제 열네살이 된 소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붕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의 톱니바퀴는 움직여야하고, 무너진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야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남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계의 움직임, 그 움직임을 참을 수 없었던 호시노는 여행 이후 크게 변모한다. 초등학생 때 집단 따돌림을 당하면서 생겼던 무력한 모습은, 변화한 그에게서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그는 세계의 붕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소년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존재다. 자신의 힘을 통해 주변의 남자 아이들을 찍어누르고, 여학생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한다.

멸망했어요. 인류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새학기, 그 날을 경계로, 세상은 잿빛이 되었다. (영화판 中)

에테르: 비언어적 물질을 통한 소통

r8UrutP9yUzMLMHImDjiRotUTTm.jpg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에테르를 느낄 수 있어.


예전에는 세계가 에테르라는 물질로 채워져 있다고 믿어왔다. 릴리가 말하는 에테르는 물리학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숲'과 같은 것으로서, 물질계와 정신계를 융합한 시공간이다. 또는 얼얼함, 따끔거림 혹은, 부드러움, 상냥함처럼 릴리가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에너지의 정체.

이것을 에테르라고 부른다.
릴리에게는 타인의 음악 따위 필요 없다. 그녀는 음악을 임신하고, 출산한다. 에테르라는 이름의 양수가 그녀의 음악을 품는다. 단지 그것뿐이다. (소설판 中)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형의 가치를 타인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 공유 과정은 인간이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공유 과정에 다다르기 전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형태가 없는 그 가치를 타인에게 제대로 건낼 수 있도록, 언어라는 이름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원활한 가치의 교류가 발생하려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잘 언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제 잔인한 세계의 법칙을 깨닫기 시작한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이 과정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해있는 청소년들에게, '에테르'라고 하는 마법의 물질이 나타났다. '릴리 슈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에테르를 느낄 수 있다. '릴리 슈슈'를 숭배하는 '릴리교'라는 종교가 있다면, 에테르는 릴리교의 심볼이나 다름없다. 똑같은 심볼을 가지고, 똑같은 교주를 섬기는 사람들끼리는, 언어화라는 형태 부여 없이도 무형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 이미 그들은 서로가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테르를 통해 치유받는 방식은 단순하다. 그저 느끼면 된다.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에테르는 자연스럽게 몸을 휘감는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고통을 품고 있던 청소년들은 그런 방식으로 위로받는다. 세상에는 언어로 옮길 수 없는 고통이 있고, 설령 언어화되더라도 끝내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 있다. 릴리 슈슈라는 신은,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에테르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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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벽해보였던 릴리교에도 허점은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호시노 일행에 의해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하스미와 시오리도, 그런 따돌림을 주도하는 호시노도, 따돌림을 방치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선생님들까지, 모두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그들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잠깐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릴리교가 선사하는 그 '위안'만큼은 완전한 것일까? 거기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풀밭에서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다. 그 노랫소리는 헤드폰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릴리 슈슈를 좋아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듣고 있는 노래, 그들이 처한 상황, 심지어 그들이 좋아하는 '릴리 슈슈의 모습'마저도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에로틱'을 가장 좋아하고, '필리아'시절의 릴리 슈슈마저 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에로틱 대신 '아라베스크'만을 들으며, 필리아 시절의 릴리를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에테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테르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릴리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느냐에 따라서도 그 성질은 달라진다. 결국,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에테르는 이름만 같을 뿐 본질은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이다.


'릴리교'는 서로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고자 했다.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조건 없이, '평등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평등이 곧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나와, 지금 내 옆에서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의 고통은 다르다. 릴리교에 속해있던 사람이 같은 신도를 만나면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릴리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게 되면,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팽팽해질 것이다. 그러나 조금씩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차이가 발견되면, 그 미세한 틈새에서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아무리 비슷한 경우라 해도 결국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언어를 대신해 에테르라는 비언어적 물질에 기대어 소통해왔던 청소년들은, 그 한계를 깨닫는 순간 다시 방향을 잃는다.


참조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이미지 출처 : T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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