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끝없는 Reload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리뷰 下

by 조종인

저번 글에서 이어집니다.


참을 수 없는 공시성(共時性)의 역겨움

■ 그런 게 아니라《작성자: 톰톰》4월 27일 (목) 23시 29분
이건 에테르와 관련된 큰 사건일지도 모른다구요! 아미카님과 제가 동시에 글라이더를 봤다는 건. 똑같은 에테르에 의한 공시성(共時性)*의 가능성이 높아요.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 없나요?

■ 에테르론에 의하면 《작성자: 사티》4월 27일 (목) 23시 31분
반복되는 에테르의 파동은 종종 그런 식으로 미묘한 공시성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릴리의 말이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톰톰님과 아미카님의 경우에도 그 가능성이 있네요. 비행기라면 몰라도, 글라이더 같은 건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니까요.

*공시성 :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로 비인과적인 복수의 사건의 발생을 결정하는 법칙원리. 카를 융에 의해 제창된 개념의 영역. (소설판 中)


릴리교의 열렬한 신도인 하스미는 에테르를 더럽히는 호시노의 행태를 참을 수 없다. 호시노 일행은 여학생들을 강간하고, 그 행위를 촬영해 피해자를 협박하는 데 사용한다. 결국 하스미가 짝사랑하던 쿠노까지 강간당하고, 같이 괴롭힘 당하는 처지였던 시오리가 자살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한다. 이제 하스미의 윤리적 거부감과 분노는 임계치를 넘어섰다. 참지 못하고 교실에서 구토를 하고 마는 하스미. 그런 하스미의 재킷 주머니에서 릴리 슈슈의 CD가 깨진 채로 발견된다. 하스미는 그 CD를 보고 "호시노가 망가뜨렸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순수한 에테르의 세계를 망가뜨린 호시노. 하스미는 더 이상 그를 같은 신도로 인정할 수 없다. 그와 자신이 같은 에테르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공시성(共時性)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다.



이 공시성을 깨뜨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둘 중 한 명이 이 세계를 떠나면 된다. 하스미가 처음 제거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하스미는 릴리 슈슈의 콘서트에서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자기 자신의 손목을 긋는 의식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콘서트 당일이 되었다. 혼잡한 인파 사이에서 하스미는 호시노와 마주한다. 하스미는 그가 들고 있는 '파란 사과'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 '파란 사과'는 릴리 슈슈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오네코(푸른 고양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의 심볼이었기 때문이다. 하스미는 너무나 잔인한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위로를 건네주던 아오네코라는 유저. 그의 정체가 자신을 죽일 듯이 괴롭혔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오네코와 호시노, 정반대의 두 인격이 한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공시성. 이제 하스미가 부정해야 할 공시성은 한 종류에서 두 종류로 늘어난다. 그의 목표도 자연히 수정된다. 자신을 제거하는 것에서 호시노를 제거하는 것으로.


인간은, 날 수 없어.
(소설판 마지막 문장)


호시노를 제거함으로써 하스미는 두 가지 공시성을 한 번에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살인사건 이후, 릴리 슈슈에게는 '불길한 여자'라는 오명이 붙게 된다. 하스미는 호시노가 에테르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했다. 분명 호시노의 폭력은 분명 추악했다. 그러나, 그 폭력은 릴리라는 이름에 귀속되지 않았다. 반면, 하스미가 저지른 살인은 '릴리 슈슈의 팬'이 저지른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결국, 에테르를 직접적으로 오염시키고, 릴리 슈슈의 날개를 더럽힌 것은 호시노가 아니라 하스미였다. 그들이 숭배하는 신은 단순히 신도의 악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신도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베타성에 의해 오염되었다. 더러워진 날개를 지닌 신은 하늘에서 추락한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신이 아니다. 날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이다.


변덕스러운 세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소설판과 영화판은 중반까지 (디테일한 설정 몇 가지를 제외하면) 비슷한 내용 전개를 보인다. 하지만, 결말부에 이르러 큰 차이가 발생한다. 소설판에서, 쿠노는 호시노 일행에게 강간당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반면, 영화판에서의 쿠노는 목숨을 끊지 않는다. 삭발한 채로 자신들을 강간한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난다. 영화판에서 쿠노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시오리다. 하스미를 통해 릴리 슈슈를 알게 된 그녀는, 연을 날리는 어른들을 바라보며 ‘하늘을 날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그러나 이 장면에 깔리는 배경음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날 수 없는 날개’다. 인간은 날 수 없다. 인간은 염원을 품지만, 세계는 그 소망을 곧이곧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컷에서 시오리는 바닥에 추락한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런데, 쿠노와 시오리가 평소에 보여주던 모습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결과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쿠노와 반 아이들이 함께 노래를 연습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몇몇 여학생들의 괴롭힘 때문에,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던 쿠노는 연주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맞서거나, 그들을 배제하는 대신, 스스로 한 발 물러난다. 반주 없이, 아카펠라로 노래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쿠노의 순응이 아니라, 자신의 부재(不在)를 미리 계산해 두는 태도다. 쿠노는 자신이 사라져도 세계가 중단되지 않도록, 이미 그에 맡는 작동 방식을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쿠노가 보여주는 모습은, 삶에 대한 의지보다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것에 가깝다.


이제 시오리를 보자. ‘하늘을 날고 싶다’는 소망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분명 삶을 향한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를 드러낸 직후, 그녀의 삶은 갑작스럽게 정지한다. 영화는 시오리가 왜 목숨을 끊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무런 준비 없이 ‘날고 싶다’는 마음만 앞선 채, 높은 곳에서 몸을 던졌기 때문일 수 있다. 둘째, 그 소망이 너무 컸기에, 현실에서 그것이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이 그녀를 몰아넣었을 가능성이다. 어느 쪽이든, 시오리가 비행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쿠노는 살아남고, 시오리는 죽는다. 죽음을 미리 대비하던 자는 살아남았고, 그토록 강한 소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던 자는 추락한다. 이 전도된 결말은 세계가 지닌 변덕스러운 속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은 염원을 품지만, 세계가 그 소망에 응답해 줄지는 알 수 없다. 소설판과 정반대로 뒤집힌 영화판의 결말은, 인간의 소망, 그리고 세계가 보여주는 결과 사이의 간극을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무관심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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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성원은 배제해 버리는 아이들의 잔인한 세계. 아이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는 복잡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줘야 할 어른들은 정작 아이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반에서 몇몇 아이들이 소외되고, 사라지고 있음에도 담임선생님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시오리에게 지갑을 도둑맞은 남자 손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오리에게 찾아와 지갑을 돌려받았을 뿐,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의 삶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개입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물론 다른 세대의 삶에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해당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세계는 철저히 아이들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이 세계에 어른들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으며, 그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무관심한 상태, 하지만 세계의 톱니바퀴는 정지하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 나의 주변에서 균열이 발생해도, 균형이 깨어지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계, 그 무관심이야 말로 세계가 가진 가장 큰 잔인함일 것이다.



결말: 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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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변덕스럽고, 무관심한 세계에서 하스미와 쿠노는 죽음 대신 삶을 택했다. 카메라 안에 두 사람이 함께 잡히고, 쿠노의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진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엔딩은 어떠한 희망의 빛도, 구원의 손길도 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마음먹은 두 아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 내내 화면에서 나오던 “Reload” 버튼. 현실에서도 Reload (재시작)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사이버 공간과 달리 특정한 세이브 포인트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다. 그 말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무(無)로 되돌리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말부에서 아이들을 괴롭히던 호시노라는 존재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껏 아이들이 겪어왔던 일들이 남긴 상처는 아직 그들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영화가 내려줄 수 없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카메라의 눈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대신,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까지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확장된 시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된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상처를 안고서도 살아가고자 하는 아이들이 있음을. 그리고 험난한 청소년기를 거쳐,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끝내 살아남은 우리의 과거 속 아이들이 있음을.


이미지 출처 : TMDB


*'씨네필매거진'에 기고했던 글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업로드함을 밝힙니다.

http://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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