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순환하는 재난과 그에 맞서는 개인의 자세

<아사코> 리뷰 및 해석

by 조종인

바쿠와 아사코, 재난과 <아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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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를 지나가는 아사코,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무언가에 불을 붙이고 있다. 아사코는 남학생들이 있던 곳을 우회해 한 사진전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가 있다. 사진전에서 나와 왔던 길로 돌아가는 아사코, 우연히도 그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와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남학생들이 있던 곳에 도착했을 때, 불꽃이 터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아사코와 남자의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이름을 묻는 짧은 대화 뒤, 불꽃이 터지는 순간 두 사람은 갑작스레 입을 맞춘다. 그렇게 두 남녀, 아사코와 바쿠의 연인으로서 관계가 시작되었다.


상당히 뜬금없어 보이는 두 남녀의 만남은 이 영화의 향후 작동원리를 압축시켜 미리 보여준 것만 같다. 우연이 되풀이되어 하나의 필연적인 사건이 되고, 그 필연적인 사건은 한 개인이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된다. 이 필연은 '재난'이라는 이름으로 작중 여러 번 반복된다. 일본 전역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사고에 대해 언급하는 라디오, 이후 료헤이가 겪게 될 지진, 아사코와 료헤이가 이사한 집 앞에서 벌어지는 강의 범람 등, 영화는 반복적으로 서사 속에 재난과 관련된 사건들을 배치한다. 이를 통해, <아사코>는 재난이라는 키워드를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주입시키며, 작중 인물들의 행동원리를 그 키워드와 연결 지어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쿠는 아사코에게 재난과 같다. 그는 갑작스럽게 아사코의 앞에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렸다. 바쿠가 아사코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일으켜도, 아사코의 친구인 하루요가 그녀와 바쿠의 교제를 만류해도, 아사코는 바쿠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재난은 불가항력이기에, 그와 맞닥뜨린 아사코는 저절로 무력해진다. 이러한 바쿠의 불가항력적인 속성은, 그가 아사코의 곁을 떠나는 순간, 고스란히 아사코에게 전염된다.



료헤이와 아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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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뒤, 아사코는 그를 잊지 못한 채 괴로워한다. 그러던 그녀의 앞에 바쿠와 똑 닮은 외모를 지닌 남자, 료헤이가 나타난다. 아사코에게 료헤이는 바쿠의 이탈로 생긴 상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존재다. 이렇듯 아사코는 료헤이를 애써 멀리하려 하지만, 료헤이는 아사코를 처음 본 이후 그녀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린다. 바쿠가 아사코에게 재난이었듯, 료헤이에게도 아사코는 재난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의 앞에 돌연 나타나 그의 마음을 빼앗고, 아무런 예고 없이 떠나갔다가, 다시 불현듯 그의 품에 안긴다.


그렇다면 료헤이를 피하던 아사코는 왜 갑작스럽게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까. 바쿠의 이탈로 생긴 상처를 료헤이와의 만남으로 극복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중요한 것은 재난이 발생한 이유가 아니라, 그것이 이미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재난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원인을 규명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되는 것은 이미 발생한 재난이 남긴 여파를 어떻게 감당하고 수습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중요한 점은 아사코가 바쿠라는 재난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료헤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료헤이와 마야, 마야와 쿠시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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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의 친구이자 전 룸메이트 마야. 단순한 주변인물처럼 보이는 그녀는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마야는 아사코와 함께 사진관에 들어가려던 도중, 료헤이가 합류하게 되며 그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마야는 계속해서 료헤이에게 마음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료헤이는 이미 아사코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이기 때문에 마야에게는 관심이 없다. 갑작스러운, 그리고 우연한 만남이 반복되면서 품게 된 연정, 이 구조는 아사코가 바쿠에게, 료헤이가 아사코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흐름과 유사하다. 그렇기에, 마야에게 료헤이는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감정을 끌어당기는 재난과 같다.


마야의 직업은 재연배우다. 료헤이는 마야에게 초대받아 그의 직장후배인 쿠시하시와 함께, 마야와 아사코가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TV로 마야의 연기를 감상하게 된다. 그런데 쿠시하시는 그녀의 연기를 보고, "어중간하다. 체호프를 연기할 때는 대사를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연기는 아무도 감동시킬 수 없다"라며 비판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말은 '어중간하다'라는 표현이다. 앞서 말했듯 마야는 재연배우다. 그녀의 일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게 아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새롭지 않은, 전에 벌어진 사건의 반복에 불과한 연기에 붙는 '어중간하다'는 꼬리표는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후 쿠시하시는 앞선 비판에 대해 사과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포기한 걸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 빛나고 있어서, 질투했어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만 쿠시하시. 그가 마야에게 쓴 '어중간하다'라는 표현은 사실 쿠시하시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이 '어중간한' 두 사람은, 2부 시점에서 부부로 맺어지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어중간함은 두 사람이 택한 삶의 방식과, 그 결말을 조용히 예고하고 있다.



재난을 대하는 자세


바쿠가 연예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잠시 흐려졌던 그의 존재는 아사코의 내면에서 다시금 선명해진다. 그와 함께, 평온해 보이던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인 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균열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쿠의 존재가 다시 선명해지면서, 아사코가 애써 봉합해 두었던 감정들 역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징조는 아사코가 바쿠와 과거에 교제했던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에서 먼저 드러난다. 이후에도 아사코는 하루요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중, 그 근처로 바쿠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돌이켜보면, 아사코는 바쿠를 피한 적이 없었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개인은 재난 앞에서 항상 무력하기 때문이다.


아사코의 안에 있는, 바쿠와의 이별로 인해 생겨난 상처는, 그와 닮은 료헤이와의 만남으로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쿠와 료헤이는 같지 않다. 바쿠와 교제하던 시절의 아사코와, 바쿠가 떠나고 료헤이와 만나던 시절의 아사코가 다르듯이. 그렇기에 바쿠로 인해 생긴 상처는 료헤이로 인해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사코는 몇 년간 불완전하게 치유된 상처를 마음속에 담아둔 채 살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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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것은 아사코가 다시 찾아온 재난을 대하는 자세이다. 재난이 남기고 간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재난과 제대로 마주 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바쿠가 아사코를 직접 찾아오자, 그녀는 그와 함께 떠나버린다. 바쿠와 직접 마주한 아사코는, 바쿠와 료헤이가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바쿠와 함께 이동하던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깨어난 아사코, 그녀는 돌연 바쿠에게 료헤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바쿠라는 재난이 아사코에게 다시 찾아왔을 때, 무력한 인간인 아사코는 결코 그 재난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재난이 인간에게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재난이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재난이 인간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다.


분명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처음 빠지게 되었던 이유는, 료헤이가 바쿠와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 그녀는 료헤이를 바쿠의 대체재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료헤이라는 사람 자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택한 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일시적으로 본인과 함께 있어줄 바쿠가 아니다. 이번에 아사코가 선택한 사람은, 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과 함께 현실을 살아갈 료헤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아사코는 한 단계 성장한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재난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던 모습에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이 시점에서, 이 영화의 영문판 제목이 <Asako I & II>인 이유가 비로소 드러난다.


그렇다면, 아사코의 친구인 마야는 어떤 방식으로 재난에 대처하고 있을까? 그녀 역시 료헤이라는 재난으로 인한 상처가 전부 치유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녀가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택한 방식은 아사코와는 닮아있으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아사코가 처음 료헤이를 택했던 이유가 바쿠의 대체재를 찾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마야 역시 쿠시하시를 료헤이의 대체재로 선택했다. 그렇기에 아사코가 료헤이와의 관계를 통해 바쿠와의 이탈로 생긴 상처를 완전히 봉합하지 못했듯, 마야 역시 쿠시하시를 통해 료헤이로 인한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 그 상처는 결국 료헤이라는 원대상과 직접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야는 그러지 못한다. 떠나가는 료헤이를 붙잡지 못한 채 쿠시하시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야의 모습은, 그녀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오랫동안, 어쩌면 영영 지닌 채 살아가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처럼

image.png 영화 <아사코>가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히 배우인 카라타 에리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물론 그 이유도 크다)


아사코의 선택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었지만, 홀로 남겨진 료헤이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바쿠라는 재난이 아사코로부터 갑작스럽게 이탈하며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겼듯, 아사코도 똑같은 방식으로 료헤이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아사코는 자신의 치유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대로, 료헤이의 상처도 어루만져주고자 했다. 상처 치유를 위해서는 대체재가 아닌, 원대상과 직면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료헤이에게 찾아간다. 그러나 료헤이는 아사코와 자신이 함께 키우던 고양이를 버렸다는 말을 한 뒤, 그녀를 쫓아내 버린다.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아사코는 옛 친구인 '노부'의 집에 다다르게 된다. 안타깝게도, 노부는 루게릭병에 걸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노부를 간호하는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때론 뭐가 옳은 건지 헷갈릴 때도 있는 거니까. 그래도 부러워. 정말 소중한 사람이면 소중하게 대해주면 되잖아.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이 말을 듣고 아사코는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을 얻은 아사코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을 넘어,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포용력까지 갖게 되었다. 다시 한번 료헤이를 찾아간 아사코, 체념한 료헤이는 아사코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앞으로 평생 그녀를 믿지 못할 거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함께 불어난 강물을 바라본다. 그 강물은 더럽지만 아름답다. 강에 대한 이 표현은 아사코의 현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그녀는 료헤이에게 쉽사리 없앨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점에서 "더럽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는 없앨 수 없었던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인간의 삶은, "더럽다" 혹은 "아름답다"라는 말의 연속이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더러운"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소수의 인간들은 그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많은 사람들이 두 표현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 속해있고, 하나의 영역에 이미 속해버렸다면 다른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코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녀는 더러우면서 아름답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붙잡아낸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계속해서 추구할 것이다. 스스로가 더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미지 출처 : TMDB


*'씨네필매거진'에 기고했던 글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업로드함을 밝힙니다.

https://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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