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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구직 중

마지막회

by 김청라

은퇴 후, 평일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어 참 좋다. 모임도 낮에 하니 공원, 유원지, 카페에 가면 사람들이 적당하게 있어 좋다. 주말은 피해서 다닌다. 번잡함이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직장인들이 모처럼 가족과 함께 나들이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 이유로 등산도 평일에 다닌다.

현직에 있을 때는 주말, 공휴일이 기다려졌고, 연휴가 길게 이어지면 "아싸" 쾌재를 부르며 환호했다.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다.


지난 설은 연휴가 너무 길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 중이셨는데, 퇴원도 진료도 모두 멈춤이었다. 꼼짝없이 연휴에 갇혀버렸다. 연휴 6일이 끝나고 맞은 금요일, 담당선생님은 휴가를 내어 9일의 연휴를 누리셨을 것이다. 긴 연휴가 짜증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는 긴 연휴로 불편을 겪는 사람들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이런 상황에도 쓰이는구나 싶었다.


평일의 영화관은 한산하다. 적당한 관람객이 있는 유원지와 달리, 우리 일행과 한두 팀만 영화를 함께 본다. 텅 빈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며 전기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영화 선정은 모임에서 평점과 후기를 참고해 결정한다. 각자의 취향이 달라 의견 조율이 쉽지 않지만, 처음부터 만장일치로 선택했던 영화가 ‘건국전쟁’과 ‘파묘’였다. 관람 후 만족도도 같았다.



뮤지컬도 보러 다닌다. 평일인데도 관객이 꽤 있었다. 뮤지컬이야말로 종합예술이다. 노래, 춤, 연기가 함께 어우러진 장르니까, 각각의 재능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가수, 무용가, 배우가 될 수 있는데, 이 모든 능력을 하나로 녹여내야 하니 그들의 재능이 더욱 빛나 보인다.


내 편한 시간에 맞춰 관공서, 은행, 병원 일을 볼 수 있어 편리하다. 직장인이 일하는 시간에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특히 병원 가는 일은 나이가 들면서 하루를 통째로 잡아먹기도 하니 직장인이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매일이 공휴일 같은 삶이라 주말이나 공휴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피하려고 체크한다. 일정이 없는 날에는 온천천을 산책한다. 다리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여행도 다리 힘 있을 때 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집에서도 TV로 영화를 본다. 다양한 방송 채널뿐 아니라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같은 유료채널에서도 시청한다. 유튜브에는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 않은 영화를 짧게 소개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있다. 전편을 보고 싶어 제목을 메모해 두고 검색해 보지만, 유료 채널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그들 채널에 올라온 영화들 중에서 고르기 한다.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평점, 출연 배우, 줄거리를 읽어본 후 선택한다. 남는 게 시간이고 널린 게 영화지만, 보고 나서 ‘시간 아깝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은 피한다. 물론 재미없으면 중간에 끄기도 하나, 대부분 끝까지 보며 감독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언가를 생각해 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아 책을 읽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소설을 읽어 주는 유튜브 채널을 찾아 눈을 감고 집중해서 듣는다. 이제는 귀가 더 중요한 감각이 되었다. 참 맛깔나게 읽어 주어 재미있고, 듣다 보면 잠도 솔솔 온다. 듣다가 깜빡 잠들어 퍼뜩 깨면 기억나는 부분까지 되돌려 다시 듣기를 반복하니 나쁠 것이 없다.


예전에는 중요한 회의나 시험이 있는 전날이면 긴장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수면제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긴장할 일도, 출근할 필요도 없다. 잠은 애쓸수록 달아나는 성질이 있다. 이제는 잠이 오든 안 오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랬더니 도망간 잠이 스르르 찾아와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되는 일도 생겼다.


강의를 듣고,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병원 다니며 하루가 빠듯하게 흐른다. 그런데도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워크넷이나 중장년 일자리 센터를 기웃거린다. 주변 동년배들이 취업해 수필 수업에 못 나온다거나 영상 제작 동아리에 참석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럽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취직할 수 있었을까? 탁월한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좋아 보인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랬듯이 일을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쓰는 것이 부러운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느새 감사한 마음이 밀려온다. 하지만, 평일의 삶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여전히 취업을 고민하는 걸 보면, 내가 특이한 걸까? 아직 젊은 걸까? 아니면 일하는 감각을 잃고 싶지 않은 마지막 몸부림일까?


이러나저러나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새로운 일을 꿈꾸며 구직 중이다.



* 이 글이 마지막 회차입니다.

* 지금까지 구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라잇킷 해주신 분들은 더욱 감사드립니다.

* 20편에 실은 사진과 그림 90 프로는 제 작품이고, 10프로는 지인의 작품을 동의하에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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