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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떠난 친구

by 김청라

먼 길 떠난 친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작별 인사할 새도 없었다. 안부 전화도 없는 나를 무심하다 하며 떠났겠지, 나 또한 고장 난 몸 고쳐 쓰느라 경황이 없었음을 알 턱이 만무했으니,


친구는 중학교 다닐 적에 ‘누구다’라는 거는 알아도 얘기해 본 적도 없다. 특별히 기억나는 추억도 없다. 성인이 되고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가정을 가졌을 때도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도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이였다.


나는 계속 같은 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그가 업종을 바꾸어 일하면서 만나지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어색하지 않았다.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만나면 편했다. 내가 하는 업무에 그가 하는 일이 은근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그는 나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의 도움으로 이룬 것은 없었으나, 마음 써 준 것이 늘 고마웠다. 그는 세미나 참석차 우리 회사를 방문할 때면 ‘다이제스트’ 비스킷을 사다 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야” 하며 먹어보라고 했다. 맛있었다.


그는 세상 보는 눈이 남달랐다. 지금의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반 국민이 알 수 없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을 잘 설명해 줬다. 덕분에 세상 보는 눈이 뜨였다. 이번 선거 끝나고 그가 보는 현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었다. 전화해 볼까 하다 말았다. 이야기가 서로의 아픈 몸에 대한 말로 끝맺을 것 같아서다. 친구에게 내가 연락 뜸했든 사정을 말하게 되면 자연스레 나의 손과 무릎 골절 수술 얘기로 흐를 것 같았다.



3년 전 그는 신장이 좋지 않아 이식수술을 받았다. 1년 경과하고 상태 확인 과정에서 아무 탈 없던 이식한 신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병원 측 잘못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과실로 보이니 소송해서 두 번째 수술비라도 받아보라고 했다. 친구는 여기저기 알아보았는데 법률팀이 잘 갖춰진 대형병원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환자에게 무료 수술해 준다는 것은 의료과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비로 이식수술을 한 차례 더 받았다. 이식받은 신장은 10년 간다고 친구가 말했다.


나는 퇴직했다. 바뀐 환경에 적응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친구는 나보다 먼저 퇴직해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뒤로 미뤘다.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서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바쁘다며, 시간 날 때 연락하겠다고 거절 아닌 것 같은 거절을 했다. 친구도 같은 선상에 두었다. 나도 바뀐 환경 적응할 시간도 필요해서였다.


거기다 손과 무릎 물리치료가 끝나갈 무렵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데가 아프고 바통을 이어가며 줄다리기식으로 병이 났다. 마치 몸은 내가 퇴직하기를 기다린 듯했다. 어느 정도 몸을 다스리고, 연락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다. 이식받은 신장은 10년은 쓸 수 있다고 했으니, 3년 경과하고 7년의 시간이 남았다고 계산이 되었다.


어느 날 문득 그 친구에게 전화해 볼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아직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만뒀다. 어쩐 일인지 그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아침이 되었다. 왠지 모를 낯선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친구가 떠난 날이었다. 서울 이식수술받은 병원에서 ‘의사 증원 문제’로 파업 중인 담당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부산 와서 두 달 만에 죽었다고 한다. 경환자들은 동네의원이 ‘영업 중’이라 치료 불편을 못 느꼈는데, 중환자인 친구에게 파업의 여파가 미친 것이다.



나에게 문득, 전화해 볼까 하는 경험은 또 있었다. 회사 입사 동기였고 그녀의 남편은 우리와 같은 직장동료였다. 그녀 남편이 갑자기 죽은 날 문득, 그녀가 떠오르면서 전화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내 쪽에서만 연락하곤 해서 또 내가 먼저 전화하면 알량한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 같아 하지 않았다. 일주일쯤 후에 소식을 들었다. 내 친구 소식도 일주일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 모두 장례식에 가보지 못했다. 늦게 소식 전한 사람들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냈더니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장례식장에 갔더라면 육신을 떠난 영혼이 육신 곁을 맴돌고 있을 때, 작별 인사라도 건넬 수 있었을까,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오지 않은 나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의 그런 경험이 있어 이제부터는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으면 무조건 전화해 볼 생각이다.


'죽음',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길, 누구나 때 되면 가야 하는 길, 나의 연락을 기다리지 못하고 바쁘게 떠난 친구야!, 별빛 달빛 동무 삼아 쉬엄쉬엄 가려무나. 길 잃지 말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가야 한다. 도착하거든, ‘잘 도착했다’고 꿈길에서라도 소식 전해주면 좋겠다.


모두가 가야 할 길이지만 이별은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내가 떠날 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덜 섭섭하도록 만날 수 있을 때, 많이 만나고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기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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