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밀밀
1995년, 나는 북경의 항공항천대학에서 중국유학을 시작했다. 1992년 중국과의 국교 수교로 앞으로 중국어를 배우면 유용하게 쓸 거라는 기대를 안고 떠난 길이었다.
북경 거리는 먼지로 가득했고, 자전거와 버스, 사람들이 뒤섞인 혼잡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한자로 가득한 간판들, 낯선 향신료 냄새,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회색빛 하늘, 정돈되지 않은 모습들.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왔다.
나는 집 부근의 노천시장을 구경하다가 노점에서 파는 음악 테이프를 한 장 샀다. 중국에 왔으니 중국 노래 몇 곡은 알아야겠다 싶어 사긴 했지만 누구의 노래를 사야 할지 몰라 노점상 주인에게 물어 추천해 준 테이프를 샀다. 음악 테이프 표지에는 다소 귀여운 여인의 사진이 있었고, 한자로 등려군(邓丽君)이라는 이름이 써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중국 와서 처음 구입한 음악을 들어볼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때까지도 등려군이 누구인지, 중국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는 가수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 甜蜜蜜(첨밀밀)을 포함해서 테이프에 담긴 다른 곡들 한곡 한곡 모두 너무나 좋은 노래들이었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감미로웠다. 가사의 뜻을 찾아 공부하며, 노래 대부분을 외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는 내게 위로였고, 집을 떠나온 외로움을 달래주는 다정한 친구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몇 년 후에 나는 영화 '첨밀밀'을 보았다. 첨밀밀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홍콩과 뉴욕을 배경으로,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이 시기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면서 많은 본토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홍콩으로 이주하던 시기다.
오랜만에 중국영화 한 편 볼 생각으로 큰 기대 없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점점 더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화 배경이 내가 중국에서 공부던 시기와 비슷해서 공감대가 생겼고, 영화를 보는 내내 중국에서 보냈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떠올라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 등려군의 음악은 주인공 장만옥과 여명 두 사람의 사랑과 추억을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영화 곳곳에서 흐르며 나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내가 북경에서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도시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지만 음악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1995년의 감성으로 내 곁에 남아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가끔 등려군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때의 북경이 떠오른다. 유난히 추웠던 기숙사 방, 친구들과 같이 밥 해 먹던 시간들, 서툴렀던 중국어, 아침이면 자주 먹던 지엔빙과 요우티아오, 그리고 내 젊은 날의 설렘과 외로움까지.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는 어디까지 왔을까. 여전히 우리는 낯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기억 속의 한 부분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한곡의 음악과 한 편의 영화가 아닌가 싶다.
주인공 여명이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등려군에게 사인을 받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Goodbye My Love"(再见我的爱人). 그때 내가 사랑했던 노래들. 그리고 그 노래 속에 담긴 나의 청춘.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그렇게 멜로디와 함께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