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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빠 육아'가 특별한 나라

-역할론

by 여서

"내가 보니까 이 아이는 잘 크겠어요."


얼마 전 영유아검진을 갔다가 할아버지 소아과 선생님께 들은 말이다.

이 원장님으로 말하자면 시크하시면서도 잔소리가 많은 '팩폭러'로,

환자 순환율이 어떻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시는 분이다.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요즘 소아과 선생님'들과는 달라,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잔소리가 애정으로 들리는 나는 '호'다.


이분은 칭찬은 거의 안 하시는데,

이날은 진심어린 눈빛으로 말씀해주셨다.


"왜요?"


"아빠가 자주 오잖아요. 이 집은 아빠 참여도가 정말 높은 것 같아요.

다른 집은 할머니나 엄마만 오는데.

아이가 잘 클 수밖에 없죠"


"요즘도 그래요?"




그렇다.

나의 남편, 그러니까 아이의 아빠는 육아 참여도가 높은 편이다.

아이가 아프면 연차를 써 병원을 가고,

등하원도 늘 열심이었다.

잠투정 많은 아이를 데리고 자고,

아이 먹일 요리는 나보다 잘한다.

둘이서만 대형마트를 다녀오기도 하고,

내 해외출장에도 적극 협조해줘서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남편은 칭찬을 많이 듣는다.


"ㅇㅇ이는 참 아빠가 남달라."

"엄마 좋으시겠다."

어린이집에서도 여러 번 들은 얘기다.


기분 좋은 얘기는 맞아서, 나도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반인 우리의 일에

남편은 칭찬받고,

내 역할은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게 된다.


내 남편이 듣는 칭찬을 보면 아직도 이런 아빠 공급(?)이 별로 없나, 씁쓸하기도 하다.

워킹맘인 나는

일을 다니며 남편과 비슷하게 벌고,

아플 때는 회사에 양해를 구해가며 연차를 낸다.

또 기관에서 연락은 보통 엄마한테 하기 때문에,

아이상담과 자잘한 스케줄은 모두 내가 챙긴다.

하원 후 씻기기와 옷 입히기, 영양제 및 밥 먹이기는 내 몫이다.

내일 날씨를 체크해 입힐 옷과 준비물을

알림장을 보며 구비해두고,

통상 1시간 이상 걸리는 '재우기'에 들어간다.


아이가 자고나면 모자른 아이 물건을 사 채워넣고,

어지른 장난감과 식기를 정리하다 보면

'진정한 퇴근'은 보통 밤 12시쯤 끝난다.




물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에 불만은 없다.

다만 나도 남편도 벌이와 육아를 함께 하는데

칭찬은 남편만 듣게 되는 구조가 신기하긴 하다.


얼마 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이렇게 말해 박장대소했다는 얘길 들었다.


"우리집은 아빠가 요리해."


"그럼 엄마는 뭐하셔?"


21세기에 이런 질문이라니.

선생님께서 의도 없이 물으신 걸 알지만 괜히 조금 힘이 빠졌다.

'엄마가' 요리를 안 하는 것이 직무유기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요리가 되는 동안 누워 있지 않는다.

빨래 세탁과 정리, 청소, 식탁 세팅, 주방 정리를 함께 하고 있다.

외출이나 여행을 하게 되면 준비물은 하나하나 다 내가 챙긴다.


체력이 약하든 아프든 말든,

엄마가 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들 늘 기본값이다.

엄마니까.



반면, 아빠가 집안일이나 육아를 잘 하는 건 아직까지도 칭찬의 대상이 된다.


남편이 자상해서 아이에게 참 좋고 나도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끔은 현타가 온다.

나도 많이 한다고 하는데, 80:20이 아니라

50:50 좀 된다고 이렇게 '못하는 엄마'와 '잘하는 아빠'로 갈린다고?


엄마도 육아와 파생된 집안일이 처음인데,

자꾸만 사회는 여자가 그것들을 탑재하고 태어난 로봇인 듯 바라본다.


나도 인생 2회차가 아닌데 말이다.




아빠역할,

엄마역할.


남자역할,

여자역할.


부정하고 싶지만

아직 있나보다,

2025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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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 흔적을 남겨주신 분들,
기다려주세요.
곧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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