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조용한 속도로,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

관계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by 제드 Jed
1. 빠름에 지친 우리, 늦음의 미학을 배우다


은퇴 후 처음 몇 달 동안은 모든 게 어색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나는 정지된 느낌.

휴대폰 알람이 필요 없어진 아침이 낯설었고,

오전 10시에 동네 편의점을 걷는 내가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늦은 속도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 한잔의 온도가 다 느껴지고,

바람이 움직이는 결을 읽게 되었다.

전에는 발끝으로 스쳐 지나가던 계절의 변화가

이제는 온몸으로 와닿았다.


빠르게 살아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 믿었던 내가,

이제는 천천히 걷는 산책길에서

삶을 다시 배우고 있다.

'속도'가 줄어들었다기보다,

삶이 질감이 더 또렷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2. 나이 들어 새로 시작한 인간관계


직장에서는 '부장님', '선배님'으로 불렸고

어느 정도 나를 감싸는 이름표가 있었다.

하지만 은퇴 후에는 그 이름표가 벗겨진다.

이웃집 누구, 파크골프장에서 처음 본 누구,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누는 첫인사는

그저 '안녕하세요'다.


신기하게도, 더 솔직해졌다.

이제는 경쟁도, 실적도, 보고서도 없으니까.

상대방의 배경보다는 목소리의 온도에

귀 기울이게 되고

나 역시 나이만큼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으로

대화에 임한다.


관계의 깊이는 시간보다 진심이라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제대로 배운다.

서로 기대지 않고, 대신 곁에 있어주는 관계.

그게 진짜 친구가 되는 방법이란 것도.


3.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다.


은퇴하고 나니 가족이 전보다 물리적으로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정서적으로는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매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침묵으로

밥을 넘긴 날이 많았다.


가족은 늘 있었지만,

같이 있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은퇴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있던

서로 다른 존재들을

다시 소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도, 부모와 자식 사이도

다시 친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필요했다.


4. 혼자 있는 연습, 함께 있는 연습


은퇴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엔 적막이 불편했지만,

그 속에서 나를 만났다.


가끔은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책을 읽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오히려 지금은

가장 평온한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있는 연습도 필요했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어울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젊은 땐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는데,

나이 들수록 '함께'라는 말이 주는 온기가 그립다.


혼자와 함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이다.

너무 외롭지도, 너무 시끄럽지도 않게.

그 균형이 내 은퇴 후 삶을 지탱해 주는

진짜 포트폴리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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