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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가 차리는 요리 3부

받은 추억의 레시피를 언젠가 스스로 차리게 되겠지

by 과몰입

벌써 요리 이야기도 3주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제가 요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순간을 되짚어보면, 자취를 시작했을 때인데요.

스스로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을 수 없지만

룸메이트가 가지고 오던 어머니의 반찬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매 끼를 밖에서 사 먹기엔 돈이 궁하고,

매번 든든한 상을 차려 먹자니 스킬이 모자랐던 저와 친구의 밥상에

그 반찬들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어머니의 시그니처 반찬이라고 할 수 있을 오이도라지무침은

친구가 집에 다녀올 때마다 꼭 챙겨 올 정도였는데요.

커다란 가방에서 그 반찬이 나오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뜨겁게 달궈진 방 안에서 그때를 생각하고 있자니,

그때, 바로 그 오이도라지무침이 먹고 싶어 집니다.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당연하지 않게 된 요리들,

언젠가 내가 만들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요리들.


이번 주, INFJ와 ENFP B의 추억이 담긴 요리는 무엇일지 만나보세요.




받은 추억의 레시피를
언젠가 스스로 차리게 되겠지

IN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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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모죠의 일지


요리에 대한 짧은 단상들 - 특선요리를 못 먹는 날


집집마다 저마다의 문화가 있는 것 같다. 한 웹툰에서 각자의 집을 나라에 빗댄 장면을 보고는 무척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도 조금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맛있고 특별한 음식을 바로 '특선 요리'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특선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주로 아버지다. 이 단어도 아버지가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손재주가 좋아 요리를 참 잘하시는데, 쉬는 날이나 내가 먹고 싶다고 한 메뉴를 뚝딱 만들어주신다. 식당에서 먹어본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시기도 하고, 요리 스펙트럼이 넓어서 빵을 굽거나 칼국수 면도 직접 밀어 만드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 ‘잔치국수’ 일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어릴 적 부모님과 좋은 추억은 영혼의 실손보험이라 소액이라도 100세 만기로 이어진다고. 나에게도 그런 실손보험이 있다. 바로 아버지가 어릴 때 만들어준 잔치국수가 그렇다.


엄마가 외출한 어느 날 아버지는 특선요리 '잔치국수'를 만들었다. 당연히 엄마 몫까지 만들어 양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엄마는 오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고, 국수는 금세 불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셋은 엄마 몫까지 국수를 밀어 넣으며 꾸역꾸역 먹었다. 꼭 면발이 목구멍까지 찬 거 같다며 깔깔 웃으면서, 누가 더 많이 먹었는지 대결을 하기도 했다. 국수 반 웃음 반을 섞어가며 식사를 했다. 그때 그게 왜 즐거웠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니와 20년도 더 된 그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식 웃곤 한다.


독립한 지금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집에 간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슨 특선 요리가 먹고 싶냐고 묻고, 아버지는 아닌 척하면서 내가 무언가를 부탁하길 기다린다. 만들어주시는 메뉴는 매번 다르지만, 늘 맛있다. 아버지의 요리는 종류도 다양해서 질리지 않는다.


그런데 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이를 먹은 만큼이나 엄마와 아버지도 많이 늙었다는 걸 느낀다. 그런 것들을 새삼스레 느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나는 안다. 지금은 당연하다고 느끼는 특선 요리를 더는 먹을 수 없는 날이 반드시 내게 올 거라는 걸. 그 빈자리가 생길 때, 그리운 맛과 함께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까?




ENFP B


초간단 레시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휘리릭 간단하게 해 주시는 음식들이, 막상 내가 해보면 결코 보통 일이 아니다.


따라 해보다 실패한 요리, 뭔가 모르게 허전한 맛이 나는 요리들이 여럿이다.

엄마가 요리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계량을 한다거나 주방이 난리통이 되는 일도 없다.

내가 하는 요란함 없이 금방 요리가 완성된다.


아침밥으로 먹기에 딱 좋은 들깨뭇국이 있다.

이 뭇국의 재료는 물, 들깨, 참기름, 무, 소금—초간단한 구성이고,


엄마도 너무 쉬우니 혼자서도 해 먹으라고 알려주셨다.

엄마는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어” 하셨지만, 그 레시피대로 해도 결과는 천지 차이다.

엄마가 10분도 안 돼서 끓여주는 따끈하고 입에서 녹는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먹으면 몸이 뜨끈해지는 그 들깨뭇국.


내가 끓인 건 도무지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끓여도 무는 부드러워지지 않았고, 그냥 말 그대로 ‘무 국’을 먹었다.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씩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보기도 하고,

사 먹는 것보다 이왕이면 직접 해 먹는 편을 더 좋아한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어느 날 만둣국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귀찮아서 배달 앱을 뒤적였는데,

따끈한 만둣국이 터치 몇 번에 30분도 안 돼 도착하는 세상이 얼마나 편리한지 새삼 느꼈다.


그런데, 그냥 집에서 끓여 먹기로 했다. 사실 만둣국 끓이는 것만큼 쉬운 요리가 없다.

배달 사진은 먹음직스러웠지만, 팔팔 끓은 만둣국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와

입안에 퍼지는 플라스틱 향이 상상되자 식욕이 확 꺾였다.

물론 진짜로 식욕이 사라지진 않았고, 결국 “그냥 내가 끓이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막상 끓여보니 라면만큼 쉬운 게 만둣국이었다.

‘정말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 대단한 걸 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끓인 만둣국이 주는 뿌듯함은 꽤 오래갔다.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온갖 레시피를 익히고 시작해도 어설프게 완성될 때가 있고,

비장하게 준비하지 않은 날에 오히려 더 맛있는 요리가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비슷하다.


물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고민하고 두려워하던 일들이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닐 때도 있다.


자존감일까, 자신감일까.

그 둘 사이 어딘가가 항상 조금 부족한 나는 요리할 때 성취감을 느끼는 편이다.


나를 위한 요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면, 맛이 조금 아쉬워도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자존감과 자신감 사이 그 무언가가 조금은 차오른다.


어디 TV 프로그램이었나, 책이었나.

“요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문장을 본 기억이 난다.


귀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고,

가끔은 “대충 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또 어떤 날은 “그래도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이 드는 게

요리와 인생이 닮은 점일지도 모르겠다.


요리를 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욕심이지만…

엄마가 금세 차려내 주시는 맛있는 음식들처럼

인생도 그렇게 뚝딱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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