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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함께 보는 중국의 역사(3)

춘추전국 시대 (1)

by bellwether Mar 05. 2025

3.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771년~기원전 221년)


주 왕실은 서융(西戎)이라 불리던 견융족이 서방에서 침입해 수도인 호경이 폐허가 됨에 따라 낙읍으로 천도한 기원전 771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그 권위를 상실했다.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550년의 기간을 춘추전국 시대라 일컫는다. 이 중 전반기인 춘추 시대는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인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 삼국으로 분열되는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지칭하는 말로 공자가 편찬한 노나라의 편년체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유래하였다. 즉, 춘추 서술의 시발점인 노나라 은공 원년(기원전 722년)에서 마무리인 애공 14년(기원전 481년)까지의 기간이 주 왕실의 천도로부터 삼진(三晉)의 분열이 일어난 시점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이 시기를 춘추 시대라 일컫는 이유라 하겠다. 춘추 시대는 비록 주 왕실의 권위가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제후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면서 춘추오패로 일컬어지는 패권국가들이 왕실을 대신해 중원의 질서를 유지했던 시기였다.


춘추 시대 패권국가 중 하나인 진(晉)나라가 한, 위, 조 삼국으로 나뉘어진 기원전 403년 이후를 지칭하는 전국 시대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패권을 다투던 제후국들이 주 왕실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면서 부국강병을 통한 영토 분쟁에 몰두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전한(前漢) 말기의 황족 출신 학자인 유향이 이 시기의 사료를 정리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전국 시대라는 표현이 유래하였다. 춘추 시대에 10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의 숫자는 전국 시대에 들어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는 일곱개의 강력한 제후국으로 재편되었다. 전국칠웅 중 그 출발이 가장 뒤쳐졌던 진(秦)나라가 성공적인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무력으로 주변국을 제압하고 진시황의 진제국이 등장하면서 춘추전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전환되면서 강력해진 무기와 함께 각종 농기구의 발달로 생산성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대표되는 사상과 문화의 융성기로 우리가 아는 중국의 제반 시스템이 그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는 야만족으로 업신여김을 받던 양자강 이남의 부족들이 초, 오, 월나라 등의 이름으로 중국의 역사에 합류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춘추전국 시대 주요 제후국춘추전국 시대 주요 제후국

획린(獲麟) : 사서오경(四書五經 :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의 사서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상서(尙書)라고도 함), 역경(易經, 주역(周易)이라고도 함)의 삼경에 예기(禮記)와 춘추(春秋)를 더한 것으로 예기와 춘추는 각각 예경(禮經)과 인경(麟經)이라고도 한다.)의 하나인 ‘춘추(春秋)’는 공자가 자신의 모국 노나라의 연대기를 토대로 편찬한 역사비평서를 말한다. 공자가 춘추의 저술에 있어서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나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서술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하여 이후 사관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는 모름지기 춘추의 필법을 따라야 한다는 표현으로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강조하곤 하였다. 춘추의 마무리는 “노나라 애공 14년 봄, 서쪽으로 가 기린을 잡다(十有年四, 春, 西守獲麟).”라는 구절로 끝나는데 여기서 춘추를 ‘인경(麟經)’이라고도 일컫는다. 춘추의 마지막 두 글자인 획린은 공자가 그 부분에서 붓을 놓았다는 의미에서 절필(絶筆)과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패자(覇者) : 봉건제를 채택한 주나라에서는 건국 시 왕실의 친척들과 공신들을 각지의 제후로 봉하여 춘추 시대에는 주요한 제후국의 숫자만 10여개에 달했으며 소규모 지방 제후까지 포함할 경우 그 숫자는 100여개에 이르렀다. 주 왕실이 권위를 상실한 동주 시대 이후 제후들 중 으뜸이 되는 힘을 가진 자라는 의미의 패자(覇者)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천자를 대신하여 각지의 제후국들을 불러 모아 맹약을 체결하는 회맹(會盟)을 통해 주나라 왕실에 대한 조공의 규모를 정하고 제후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춘추 시대의 대표적인 패자로는 ‘제환진문(齊桓晉文)’이라 하여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초(楚)나라 장왕(莊王), 송(宋)나라 양공(襄公), 진(秦)나라 목공(穆公) 등을 더하여 ‘춘추오패(春秋五覇 : 제환진문과 초 장왕을 춘추오패로 꼽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나머지 둘은 송 양공이나 진 목공을 대신해 오왕 부차나 합려 또는 월왕 구천 등을 넣기도 한다.)’라 일컫기도 한다.


관포지교(管鮑之交) : ‘당시선(唐詩選)’에 수록된 두보의 ‘빈교행(貧交行, 가난한 시절의 사귐)’이라는 시 중에서 “그대들은 관중과 포숙의 가난한 시절의 사귐을 아는가(君不見管鮑貧時交).”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관중은 춘추오패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1등 공신이나, 집안이 가난하여 곤궁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관중은 부자 친구인 포숙과 장사를 하면서 수익을 똑 같이 나누지 않고 항상 자기 몫을 더 챙겼다. 주위 사람이 이를 포숙에게 일러 바쳤지만 포숙은 관중이 가난하니 더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출세욕이 강했던 관중이 벼슬을 하려다 세번이나 실패했지만 포숙은 관중에게 시운을 잘 못 만난 탓이지 관중의 재주가 부족한 게 아니라며 위로하였다. 또한, 함께 전장에 나가 세번이나 도망친 관중을 주위에서 비난할 때도 포숙이 나서 관중에게는 노모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그를 감쌌다. 당시, 두 사람이 살던 제나라의 국군(國君)인 제 희공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관중과 포숙은 각각 둘째 아들 규와 셋째 아들 소백을 섬기게 되었다. 제 희공의 사망 후 맏이인 제아가 제 양공으로 즉위하였으나, 누이동생과의 근친상간이 화근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 때가 왔다고 판단한 관중과 포숙은 각자 자신이 섬기는 공자가 대권을 차지하도록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기원전 685년, 치열한 각축전 끝에 결국 포숙이 섬기던 막내 공자 소백이 제 환공으로 즉위하였다. 제 환공이 경쟁자였던 공자 규를 제거하면서 줄을 잘 못 선 관중 역시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포숙은 제 환공에게 제나라만을 다스릴 작정이라면 자신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천하를 호령하려 한다면 관중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관중을 중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관중은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이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관포지교는 세상에 둘도 없는 벗과의 돈독한 우정을 이르는 말이지만 재주 있는 관중보다는 덕이 있는 포숙과 같은 벗이 곁에 있어야 가능할 듯하다.

관중과 포숙관중과 포숙

곳간이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廪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 포숙의 건의에 따라 관중을 쓰기로 한 제 환공은 기원전 686년, 관중을 재상의 자리에 앉혔다. 관중과의 허물없는 대화를 통해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제 환공은 국가 운영의 전권을 관중에게 위임하고 흔들림 없이 그를 지원했다. 젊어서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있었던 관중은 상공업의 중요성을 파악해 중상주의를 기반으로 제나라의 부국강병책을 추진해 나갔다. 관중이 도입한 행정 및 군사 조직의 개편을 통해 힘을 축적한 제나라는 주 왕실의 권위를 세워주는 동시에 다른 제후국들을 압박하면서 중원의 패자로 부상했다. 유물론적 법가 사상가였던 관중은 자신의 통치 철학을 담은 ‘관자(管子)’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책의 상당 부분은 후세의 학자들이 관중의 명성을 빌려 가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관중의 사상이나 행적만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는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가의 자세와 관련하여 관자의 ‘목민(牧民)’편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이 오늘날에도 회자된다. “목민관의 일은 계절의 변화를 알고 창고를 지키는 것이다. 나라가 부유하면 백성들이 찾아오고 땅이 개간되면 백성들이 머물 것이다. 곳간이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알게 된다(倉廪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우리 속담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포도청에 끌려갈 짓이라도 마다 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이 역시 먹고 입는 것이 해결되어야 염치를 안다는 의식족즉지영욕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존왕양이(尊王攘夷) : 춘추오패의 으뜸으로 꼽히는 제 환공은 관중의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주위의 소국들을 점령하면서 나라를 키워 나갔다. 산동반도를 끼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어업과 제염업의 발달로 경제력도 향상되면서 수도인 임치에는 각국의 명사와 현인들이 몰려들었다. 제 환공은 ‘계절(繼絶 : 후사가 끊어진 제후국의 후계자를 세우는 것)’과 ‘존망(存亡 : 망해 없어진 제후국의 후손에게 영토를 나눠 줘 명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을 통해 제후국들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제 환공은 즉위 후 43년간 재위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주 왕실을 받들고 대외적으로는 북쪽 산융족과 남쪽 초나라 등 오랑캐의 침입을 물리친다(尊王攘夷)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기원전 651년, 규구에서의 회맹 등을 통해 패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존왕양이라는 표현은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이나 일본의 보수 세력이 서구 열강에 의한 문호개방을 반대할 때의 슬로건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 제나라와 함께 중원의 강자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진(晉)나라는 주 성왕(周 成王 : 주 무왕의 아들로 뒤를 이은 주 강왕(康王)과 함께 주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하여 성왕과 강왕의 치세를 “성강(成康)의 치”라고도 한다.)의 동생에게 봉해진 나라로 주 왕실과 같은 ‘희(姬)’성의 나라였다. 진나라는 산동반도에 위치하여 중원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제나라와 달리, 주나라에 바로 이웃한 강대국이었다. 영토확장에 적극적이었던 진 헌공은 재위 22년인 기원전 655년, 이웃한 소국인 우나라 국군인 우공에게 금은 보화를 선물하면서 바로 인접한 또다른 소국 괵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리자고 요청하였다. 우나라의 재상이었던 궁지기는 우공에게 괵나라와 우나라의 관계는 입술과 이와 같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는 말로 진나라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먼 우공이 진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 궁지기는 가족과 함께 우나라를 떠나면서 우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 예언하였다. 궁지기의 말대로 진 헌공은 우나라를 통과해 괵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후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마저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공에게 선물로 준 금은 보화까지도 도로 뺏아 버렸다. 역사적으로 순망치한의 사례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에 명나라가 대규모 원군을 보낸 것도 조선이 명나라에게는 입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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