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자락
"넌 짝과 아주 친한 것 같더라. 많이 도와주니?"
내가 짐짓 말머리를 돌리자 남우는 다시 물었습니다.
"작년에도 같은 반이었어. 참 고마운 친구야. 그런데 설희야. 나, 이상하지?"
나는 가만히 남우의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놀랐어. 근데 지금은 네가 마법에 걸린 왕자님일 거란 생각이 들어. 언젠가 마법이 풀리면 넌 멋진 왕자가 될 거야. 어후 춥다. 우리 집에 가자."
내 말에 남우는 들뜬 것 같았습니다.
서둘러 그림 도구를 챙겨 들고 일어나던 남우가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나는 남우의 손을 잡았습니다. 남우 손은 어린아이의 손처럼 작고 보드라웠습니다.
남우와 나란히 들어서자 어머니는 놀라는 눈치였지만 반가워했습니다.
"어서 들어와라, 밖이 춥지?"
어머니의 다정한 말에 남우는 싱그레 웃었습니다.
남우는 이따금 결석했습니다.
"그 애가 여느 아이들처럼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모양이구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되곤 했습니다.
나는 틈나는 대로 남우네 집에 놀러 갔습니다.
남우는 내가 쩔쩔매는 수학 문제를 척척 풀었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운동장에서 그린, 나무들이 우거진 숲 그림에서는 솔향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우리 나무가 그림 속 나무처럼 자라려면 십 년은 더 있어야겠지?"
내가 키 큰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남우는 창 밖 하늘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십 년 뒤면 그렇게 자랄 거야. 나도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힘껏 자라 봤으면."
남우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산골에는 두 계절이 함께 있었습니다.
여름의 아침저녁은 가을처럼 서늘했고, 가을의 아침저녁은 겨울처럼 추웠습니다.
바람이 맵싸한 날이었습니다.
나는 남우네 집에 놀러갔습니다.
남우가 집 밖 뜰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땅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우 곁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추운데 왜 여기 있어?"
남우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지금 안에서 형이랑 엄마가 얘기하고 있거든."
"무슨 얘기?"
"형이 시내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데, 나 때문에 이사 갈 수 없어서... 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군덕거리는 게 싫거든."
"그렇다고 계속 한 곳에서 살 순 없잖아."
남우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거실 쪽 유리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다 저 자식 때문이야. 우리 식구가 숨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저 벼엉신 때문에..."
철우가 벌게진 얼굴로 냅다 소리쳤습니다.
"너, 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니?"
철우 어머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철우의 뺨을 철썩 때렸습니다.
남우와 나는 엉겁결에 일어나 화가 잔뜩 난 철우를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와 다른 철우의 말투에 화들짝 놀란 남우는 나무처럼 서 있었습니다.
남우는 한동안 멀거니 그자리에 서 있다가 뒤뚱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어갔습니다.
나는 남우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왜 날 낳았어, 엄마. 왜 날!"
남우는 자기 나무를 부여잡고 흐느꼈습니다.
나는 남우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일렁거리는 물결 같은 남우의 어깨만 마냥 바라보았습니다.
달려 나온 철우 어머니가 눈물 젖은 얼굴로 남우에게 다가서더니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운동장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남우는 나무를 두 팔로 안고 울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집 쪽에서 철우가 휘청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철우는 남우를 뒤에서 감싸 안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미안해, 남우야.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용서해 줘."
철우의 음성이 바람에 흔들리는 은사시나뭇잎처럼 떨렸습니다.
다시 봄이 찾아오고, 철우는 읍내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자전거 통학을 하는 철우가 저녁이면 남우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운동장을 도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그 모습이 무척 정겨웠습니다.
남우와 나는 언제나 수목원 나무 앞에서 만났습니다.
봄볕이 따사로운 날, 이제 우리 나무가 된 남우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설희야, 나무는 겨울엔 앙상한 가지뿐이지만 봄이 되면 새잎을 달아. 그런데 왜 난 언제나 같은 모습일까?"
남우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나는 말없이 남우 손등에 내 손을 얹었습니다.
보통 때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마음에 안쓰럽게 남았습니다.
여름 햇살을 타고, 어느덧 기다리던 방학이 되었습니다.
할머니 댁으로 떠나기 전 날에 남우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있다 올 거니?"
"열흘쯤 있다가."
나는 열 손가락을 나뭇잎처럼 펼쳤습니다.
"너 없으면 심심할 거야. 그리고 보고..."
남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철우 형하고 잘 지내면서 뭘 그래. 이번 방학에는 형이랑 개울가에서 물놀이 좀 많이 해. 아이들이 멱 감으러 같이 가자고 해도 한 번도 간 적이 없잖아. 물이 겁나니?"
"......"
"네 마법이 풀릴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혹시 아니? 물속에서 마법이 풀려 콩나물처럼 키가 쑥쑥 자랄지."
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말도 안 돼."
남우도 따라 웃었습니다.
더위 탓인지 남우는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웃는 눈은 한결 더 맑았습니다.
할머니 댁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남우가 보고 싶고, 집에도 가고 싶어 마음이 들썽거렸습니다.
"엄마, 이제 그만 집에 갈래요."
"좀 더 있다가 와. 아니, 아예 방학 끝날 때쯤 와라. 엄마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전화를 받는 어머니 음성이 눅느지러져 있었습니다.
다음 날, 걱정이 된 나는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어머니는 대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널던 빨래를 떨어뜨렸습니다.
"아니 너, 오지 말라니까..."
"어멈 아프다니까 설희가 어찌나 보채는지 연락도 못하고 그냥 왔다. 좀 괜찮니?"
"네에, 사실은 제가 아픈 게 아니고..."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습니다.
"엄마, 정말 아프지 않은 거죠? 아유, 다행이다."
나는 가슴에 손을 모았습니다.
"그럼 난 남우네 갔다 와야지."
대문을 막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당황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저어, 설희야. 실은 남우가 많이 아파서 지금 여기 없어."
"어디가 아픈데? 시내 병원에 갔어요?"
"설희야. 그게 그게... "
마당 나뭇가지의 매미가 요란스럽게 울어 댔습니다.
"언제쯤 오는데?"
"저어....저, 남우는 며칠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어."
매미 소리가 따갑게 귓전에 달라붙었습니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남우가 왜 하늘나라에 가."
나는 어머니를 밀치고 남우네 집으로 달음질쳤습니다.
남우네 집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남우야, 남우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대문을 두드리다 지친 나는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남우 이름이 적힌 나무 아래 서자 하늘이 노랗게 맴돌았습니다.
나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발버둥치며 울부짖었습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남우가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치받치는 슬픔으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안 돼, 남우야. 안 돼!"
나는 울먹이며 남우 나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뒤따라와 지켜보던 어머니가 나를 꼭 안고 부드럽게 등을 다독였습니다.
"휴우우... 너 간 날부터 남우는 철우와 개울로 매일 멱을 감으러 다녔어. 그날은 철우가 저수지 깊은 물에도 한 번 가 보자고 했대. 그런데 수영이 서툰 철우가 저수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자 남우가 형을 구한다고 뛰어들었대.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알려서 철우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남우는..."
나는 밤새 높은 열에 시달렸습니다.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 주며 주고받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꿈결처럼 들렸습니다.
"몸도 성하지 않은 애가 왜 매일 멱을 감으러 다녔다냐?"
할머니의 물음에 어머니는 한숨처럼 말했습니다.
"물을 몹시 싫어했다는데 웬일로 올 여름에는 뻔질나게 물가를 찾았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나는 가물거리는 빛속에서,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는 남우를 보았습니다.
지금, 남우 나무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고 잎이 다옥합니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에 남우의 웃는 모습이 보입니다. <끝>
*이야기 너머, 작은 속삭임
그 여름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 아이의 맑은 눈빛과 웃음소리, 그리고 끝내 하지 못한 인사까지...
이 글은 우리 곁을 떠난 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아이를 기억하는 이야기입니다.
말로 다 하지 못한 순간들과 사라진 것들 속에는 깊이 남겨진 것이 있습니다.
떠난 뒤, 누군가의 그리움 속에 피어나는 것은 아름다운 슬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