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자락
복사꽃이 눈처럼 흩날립니다.
한 움큼 꽃잎을 내 머리 위에 뿌려 주며 환하게 웃던 남우.
남우는 열두 살 소년, 내 친구였습니다.
10년 전, 그 해 겨울의 끝은 길었습니다.
나는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머니 곁을 맴돌았습니다.
"바쁘니까 저리 가서 애들하고 놀아."
이삿짐을 내리던 어머니가 고갯짓을 했습니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얘들아, 들어가게 좀 비켜라. 겨울이 되돌아오려나, 아이 추워."
시골 아낙네 같지 않은 차림의 여인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뒤에 키 큰 남자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어머, 오셨어요. 집 들여놓고 인사 가리고 했는데."
어머니가 반갑게 맞았습니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우선 식사부터 하시라고요. 이 앤 우리 큰아들이에요. 철우야,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 새로 오신 교감 선생님 사모님이셔."
"안녕하세요."
철우라는 아이가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몇 학년이니, 6학년? 아유, 잘도 생겼네."
어머니는 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고 서 있는 내 손을 잡아 앞으로 끌었습니다.
"우리 아이예요. 설희야, 교장 선생님 사모님께 인사드려야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설희라고. 이름처럼 아주 예쁘구나."
"이 애가 태어났을 때 흰 눈이 평평 내렸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습니다. 몇 걸음 사이를 두고 철우와 내가 따라갔습니다.
교장 관사는 나무로 만든 2층 집이었습니다.
지붕 위에는 아직 흰 눈이 다문다문 얹혀 있었습니다. 집 주위를 둘러싼 나무 울타리의 하얀 눈이 눈부셨습니다.
'동화에 나오는 숲 속의 집 같아. 여기 마법에 걸린 왕자님이 살고 있다면.'
나는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집 별미인데, 호박죽 좋아하세요?"
걸쭉한 호박죽에 댕글댕글한 새알이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거실에서 호박죽을 달게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를 본 아이가 황급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왜 그러니, 설희야?"
"어 엄마, 이상한 애가."
그 순간, 철우 어머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어머니는 어리둥절해서 나와 철우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미처 식구 소개를 못했어요. 우리 작은아들 남우예요."
철우 어머니는 차분한 얼굴로 잠시 창 밖에 눈길을 보냈습니다.
"남우야, 괜찮아. 내려와서 인사드려."
"싫어요."
볼멘소리가 들렸습니다.
"괜찮대도. 이제 자주 봐야 할 사이야."
나는 엄치손톱을 잘근잘근 물었습니다.
긴장이 되면 나도 모르게 나타나는 버릇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했습니다.
다시금 조심스럽게 층계를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가 내 맞은편에 와서 섰지만, 나는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남우예요. 남우야, 교감 사모님께 인사드려. 여긴 새 친구 설희란다."
철우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조심스레 고개 들며 남우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아! 나도 모르게 다시 움찔했습니다.
영화에 나왔던 이티 같은 모습...
머리에 비해 턱없이 작은 몸, 자그마한 키, 창백한 피부와 유난히 크고 맑은 눈. 그런 남우를 대하기가 서먹서먹했습니다.
남우는 나를 보며 쑥스럽게 웃었습니다.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웃는 모습이 참 맑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웃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새 집이 낯설기도 했지만 남우 모습이 자꾸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에 가려고 안방 문 앞을 지나다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아직 남우를 못 봤죠? 아휴, 난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사모님이 남우 임신했을 때 약을 잘못 먹었대요. 눈. 코 입은 멀쩡한데 정말 딱하더라고요."
바람이 문을 살짝 흔들며 지나갔습니다.
내가 다시 남우를 만난 것은 며칠 뒤 개학날이었습니다.
5학년 1반, 중간 자리에 앉아 새 친구들 얼굴을 살피다가 앞 줄 가운데에 앉아 있는 남우를 보았습니다. 남우는 모른 척했습니다.
남우는 체육 시간이 되면 교실에 남았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교실을 바라보면, 남우가 창에 기대어 물끄러미 운동장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이들 몰래 교실을 힐끔거렸습니다. 몇 번 남우와 눈이 마주쳤지만 얼른 고개를 돌렸습니다. 남우와 나 사이의 어색함은 한 달 남짓 계속되었습니다.
미술 시간 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남우 짝이 물통에 물을 담아 남우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야 인마. 넌 올해도 남우한테 알랑거리냐. 교장 아들이면 아들인거지 다리가 병신도 아닌데 왜 네가 잔일을 거들어주냐고. 이제부터는 저기 있는 교감 딸 시중까지 들지 그래"
뒤쪽에서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반 아이들이 주먹대장이라고 부르는 용태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왜 내 말이 떫으냐, 교감 딸?'"
용태의 말에 뒤를 돌아보던 남우는 나와 눈길이 닿자 얼굴이 발그레졌습니다.
"너, 너무 말 심하게 하는 것 아니니?"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세차게 밀려왔습니다. 내 턱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오호, 교감 딸이라고 교장 아들 편을 들겠다 이거지?"
용태가 건들거리며 내 자리로 왔습니다.
"왜 그래. 불만 있으면 내게 말해."
남우가 일어났습니다.
용태는 나를 지나쳐 남우에게로 갔습니다. 용태가 다짜고짜 남우의 한쪽 어깨를 팍 밀쳤습니다.
남우는 힘없이 넘어지면서 교탁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혔습니다. 남우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어머!"
나는 급히 남우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이마에 댔습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몰려들었습니다. 소란스럽던 교실은 선생님이 오신 뒤에야 잠잠해졌습니다.
이곳에 온 후 나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재미를 잃었습니다.
예전 학교 길은 오가면서 자줏빛 참패랭이와 연보라색 제비꽃, 하얀 찔레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감 사택은 바로 학교 담장과 붙어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를 하고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 운동장 가 한쪽에 만들어 놓은 수목원의 나무들은 키가 들쭉날쪽했습니다. 수목원 건너편에는 나무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우였습니다.
"여기서 뭐 해? 이마는 괜찮니?"
내가 가까이 가자 남우는 겸연쩍어하며 이마에 붙인 반창고를 만졌습니다.
"아까 손수건 고마워. 철우 형이 용태를 혼내 주겠다고 하는 걸 말렸어."
"참 착하네, 형이 잘해주니?"
남우가 들었던 붓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습니다.
"응, 언제나 내 편이야."
"넌 좋겠다. 형이 있어서. 그런데 지금 뭘 그려?"
"수목원 나무. 여기엔 내 나무도 있어."
"내 나무라니?"
나는 귀를 기울이며 남우 옆에 앉았습니다.
"해마다 식목일이 되면 1학년들이 이곳에 나무를 심어. 아버지는 조회 시간마다 우리들에게 나무처럼 바르고 튼튼하게 자라야 한다고 하시지. 자기 나무 밑에는 이름표도 있어. 문남우, 이렇게. 모두들 자기 나무가 잘 자라도록 정성껏 돌봐."
겨울을 잘 견딘 남우의 나뭇가지에는 연초록빛 새순이 돋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 키가 고르지 않았구나. 전학 온 나만 나무가 없네. 남우야, 네 나무를 내 나무라고 해도 되니? 우리 같이 돌보자."
남우의 나무는 튼실해 보였습니다.
남우는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여기에 네 이름도 달자. 그런데 저어, 저... 나 말이야. 보기 흉하지? 처음에 무서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