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레콜레타를 달리다, 도시 속 시간의 흔적

국립도서관에서 공동묘지까지, 역사를 가로지르는 러닝

by 신정호

아침 공기가 한층 선선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아홉 번째 날, 오늘의 러닝 코스는 레콜레타(Recoleta).

레콜레타라는 이름은 ‘회랑(claustro)’에서 유래되었다. 회랑은 수도원이나 성당, 대학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아치형 복도를 의미하며, 내부 정원을 둘러싸는 구조로 조성되는 경우가 많다. 17세기, 프란시스코 수도회(Recoletos Franciscans)가 이곳에 정착하며 수도원과 회랑을 세웠고, 그때부터 이 지역을 ‘레콜레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레콜레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부에 위치한 고급 주거 지역으로, 유럽풍 건축물이 밀집해 있으며, 예술과 역사의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레콜레타 공동묘지, 국립도서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법학부가 자리하고 있어,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구글 맵으로 미리 러닝 코스를 설계하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Biblioteca Nacional de la República Argentina). 숙소를 나서며 가볍게 몸을 풀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늘은 단순히 거리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역사와 시간을 가로지르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국립도서관: 거친 콘크리트 속에서 발견한 건축미

내가 거주하고 있는 팔레르모에서 레콜레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첫 목적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도서관(Biblioteca Nacional de la República Argentina)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도심을 누비며 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거대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이 건물은 일반적인 도서관과는 사뭇 달랐다.

이 건물은 투박한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한다. 1961년, 건축가 ‘클로리도 테스트(Clorindo Testa)‘가 설계한 이 도서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강렬한 직선미로 이루어져 있다.

거칠고 강한 인상을 주는 이 스타일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문득 한국 강원도의 뮤지엄 산(안도 타다오 설계)이 떠올랐다.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한 미니멀한 건축물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과 이 도서관이 닮아 있었다.

건축이 국경을 넘는 방식은 흥미롭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한 러닝 코스 때문이 아니라, 이 도시의 건축과 문화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였다. 가볍게 계단을 뛰어오르며, 도서관의 투박한 외관을 한 번 더 음미했다. 특히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시간에 건물을 오롯이 혼자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침 일찍 러닝화를 신고 나선 러너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인 듯했다. 도서관의 웅장한 감동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향했다.



Monumento a Bartolomé Mitre: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도서관을 지나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향하던 길, 예상치 못한 거대한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목적지에 포함된 곳이 아니었지만, 이런 우연한 발견이야말로 도시를 달릴 때 마주하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오, 이거 멋진데? 이건 뭐지?”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와봐야겠다. 아니, 지금 검색해볼까? 러닝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예상하지 못한 장소를 발견하고, 궁금해지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계획이 생겨나는 것이다.


거대한 청동 조각상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조깅을 하고 있었다. ‘바르톨로메 미트레 기념비(Monumento a Bartolomé Mitre)’.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é Mitre)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조각에는 그의 정치적 업적과 군사적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의 생애가 한 장의 조각처럼 응축되어 있었다. 19세기 중반, 아르헨티나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지도자. 그 앞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운동하고,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어쩐지 조화롭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조용한 산책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몇몇 러너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경쾌하게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신이 났다. 좋은 러닝 코스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사실도, 이곳에서 많은 러너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도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신발 밑으로 느껴지는 잔디의 폭신한 감촉.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조용한 공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의 러닝 코스를 모두 탐색한 후, 나만의 러닝 코스를 설계해서 달려보는 것.’ 아주 괜찮은 목표가 떠올랐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꼭 실행해 봐야겠다. 기분 좋은 기대감과 함께, 다시 원래 목적지였던 레콜레타 공동묘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레콜레타 공동묘지: 죽은 자들의 도시

조금 더 달려 도착한 곳은 레콜레타 공동묘지(Cementerio de la Recoleta). '공동묘지'라고 하면 보통 음침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은 전혀 달랐다. 높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대리석 묘비와 정교한 조각상들.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도시 속에 자리한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에바 페론(Evita)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 후안 페론(Juan Perón)의 부인이자, 사회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며, 복지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그녀를 기억하며 이곳을 찾는다. 문득, 지난 일요일 방문했던 마요 광장(Plaza de Mayo)의 카사 로사다(Casa Rosada)가 떠올랐다. 그녀가 서 있던 그 광장에서, 그리고 지금 그녀가 잠들어 있는 이곳에서,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실감했다.

공동묘지는 오전 9시에 개방되기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철창 너머로 내부를 들여다봤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저택의 창문을 통해 몰래 내부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줄지어 늘어선 묘지들.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작은 대리석 건물과 같은 형태였다. 곳곳에 새겨진 화려한 장식과 조각들, 가문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 내부가 보이는 유리문까지. 마치 죽은 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어서도 의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라면 이런 모습일까.’ 조만간 이곳의 내부를 직접 걸어보리라 다짐하며, 마지막 목적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법학부: 웅장한 학문의 전당

러닝의 마지막 목적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법학부(Facultad de Derecho, UBA)였다. 며칠 전 방문했던 공과대학과 비교해도 훨씬 웅장한 건물이었다. 거대한 기둥과 넓은 계단,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이 돋보였다.

관광객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도 천천히 내부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다양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아르헨티나의 법조인과 정치인들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1821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과 함께 설립된 법학부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명망 높은 법학 교육 기관 중 하나로, 수많은 법조인과 정치인을 배출해왔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대학이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까. 이런 유서 깊은 대학에서 내가 3월 5일 강의를 하기로 일정이 확정되었다.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이곳에서 내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웅장한 건물 앞에 앉아 있자니 다시 한번 마음이 다잡혔다. 잘 준비해야겠다.


대학 건물을 나와 계단에 잠시 앉아 쉬면서 시선을 멀리 두었다. 오늘 이른 아침, 달리며 지나온 흔적들을 되짚으며 생각했다. 역사와 학문이 함께 숨 쉬는 레콜레타에서의 러닝은 최고였다.




하루의 마무리: 저녁 산책과 이 도시의 리듬 속으로

하루 일정을 마치고 잠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쉬었다. 저녁이 되니 공원은 한층 조용해졌고, 몇몇 현지인들이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도시의 리듬 속에서, 나도 잠시 그들과 같은 속도로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지나온 풍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국립도서관에서 만난 묵직한 건축의 아름다움, 공동묘지에서 마주한 시간의 깊이, 법학부 앞에서 다짐했던 새로운 목표. 러닝을 하며 도시를 탐색하는 일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이곳이 조금씩 내 안에 쌓여가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낯선 곳이 조금 덜 낯설어졌다.


‘이 도시는 여전히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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