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노래를 듣다가 문득 멈춰섰다. ‘지금 도로 한복판에 누워서 뭘 생각하는 것 같아 머릿속이 시끌시끌해’(성진 -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라는 내용의 가사를 들었다. 머리맡에 차들이 지나가는 8차선 도로라니 무서운 생각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 장면이 이해가 됐다. 나는 가끔 운동장 한가운데에 누워있을 때가 있다.
내가 있었던 세 번째 학교에서는 반에서도 운동장이 잘 보였다. 특수학급은 주로 1층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 학교는 특이하게도 4층에 배치되어 있어 운동장이 한눈에 가득 찼다. 여름이 되면 오래된 학교답게 배수로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비가 온 다음 날에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다가, 뜨거운 여름빛에 웅덩이가 있었다는 자국이 생겼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웅덩이 자국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나는 지금 운동장 한가운데 누워있는 걸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흙탕물이 가득한 웅덩이를 보고 있으면 교실에서 내가 천천히 내려가 웅덩이 한가운데로 조심히 서서 천천히 눕는 장면을 그리곤 했다. 비가 온 뒤 흙탕물 범벅인 웅덩이에 눕는 내 모습은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데, 물 웅덩이가 다 말라 남은 자국 위에 누워 있는 나의 모습은 희한하게 그려졌다.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운동장 한가운데일까?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라는 공간과 함께해서 그런 걸까? 이것도 어찌 보면 직업병 중 하나일까?
나에게 운동장은 시끄럽지만 나 홀로 배제된 곳이었다. 그곳은 외롭고, 속상하고, 버거운 곳이었다.
나는 이 상상들은 자주 곱씹었고, 그냥 누워있다고 인정할 때도 있었다.
수업이 버겁다고 생각할 때, 행정에 관한 일들이 줄지어 있을 때, 퇴근 시간쯤에 그날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을 때, 특수교사로서 부족함을 느낄 때. 그럴 때면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운동장 한가운데 누워있다’라고 되뇌었다.
나는 감정의 폭이 깊은 사람이다. '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감정의 폭이 깊어 하나의 감정에 빠지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특히, ‘운동장 한가운데’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에게 '운동장 한가운데'는 외롭고, 속상하고, 힘들다는 감정이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벗어나기 힘들지만, 누구보다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기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운동장 한가운데'라는 괴물을 맞서기 위한 무기. 내가 이때 찾은 무기는 명상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30분 일찍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바르게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린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고, 어깨 힘을 뺀다. 나의 호흡에 나를 맡긴다. 여러 생각들이 나타나면 조용히 이야기했다. '지금은 아니야. 잠깐 들어갔다가 이따 얘기하자. 지금은 아니야.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었거든. 지금은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우리 반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듯 차분하고 다정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생각들을 달랬다.
명상을 하다 보면 시간에 대한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곤 했다. 어느 날을 10분이 1시간 같을 때도 있어 중간에 ‘왜 시간이 안 가지?’하고 눈을 살그머니 떴다 남은 시간을 보고 다시 감은 날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같은 10분이 3분 같아 ‘뭐야? 나 숨 다섯 번 밖에 안 쉰 거 같은데?’하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놀라움을 느낀 날도 있었다.
그렇게 아침 명상 10분은 운동장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나를 교실 한가운데로 데려다주었다.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뜰 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찬찬히 보면서 ‘그래, 나 지금 교실 내 자리에 앉아 있어.’하고 내가 있는 공간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여전히 가끔 아니, 자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운동장 한가운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제는 그럴 때 그냥 타이머 10분을 맞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명상을 시작한다. 아무 배경음도 없이 그냥 시작하여 눈을 뜨면 내가 있는 곳이 운동장 한가운데가 아니라 소파 한가운데, 침대 한가운데, 방바닥 한가운데라는 공간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제 안다. 나는 이제 운동장 한가운데가 아니라 내가 있는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