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유전

by 현솔
아이와 손잡고 걸어가던 어느 오후

제목인데, '빌어먹을'이라니,

이 과격하고도 무례한 단어에 놀란 이가 있다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보다 어울리는 단어를 찾지 못했기에

지금 쓰는 이 글의 제목은 '빌어먹을 유전'이 맞습니다.


사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진 유전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가족이니 당연히 닮는 거지 싶었다

(물론 친구들이 남동생과 닮았다고 할 때는 꽤 열받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이 유전이 때로는 무섭고, 또 때로는 두렵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특히 아들과 나는 복사, 붙여넣기 수준으로 닮았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적인 부분도 비슷한 것이 많다


오죽하면 우리 남편은

"나는 치아와 머리 크기 정도만 물려준 것 같다"고 표현한다


아래로 처진 눈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남들보다 긴 팔과 다리

아, 딱 여기까지만 물려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어릴 적 성적표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적혀 있는 표현이 있다


'산만하여 정리정돈이 힘들고...'


이 소름 돋는 표현은 ADHD를 진단 받아 치료를 받는

우리 아이의 통지표에도 적혀 있다(물론 요즘은 많이 순화해준다)

즉, 아들의 ADHD는 나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ADHD의 모든 원인이 유전은 아니지만

부모 중 한명이 ADHD일 경우엔 자녀가 ADHD일 가능성이

약 40~60% 정도라고 한다


나는 그리고 안짱다리로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우리 아들은 그것까지 닮았다 (다행히 아들은 교정을 받고 있다)

그냥 자도 더운 여름밤에 교정기까지 차고 자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미어진다

이러니 내가 빌어먹을 유전이라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아들은 Y염색체보다 엄마에게 물려받는 X염색체의 영향을 더 받기 때문에 지능적인 부분도 엄마를 닮는단다

최근 이러한 내용을 담은 SNS 릴스에는

웃기면서도 슬프게도 엄마들의 사과가 끝없이 이어진다


'아들 미리 미안...'

'아빠를 닮아야 되는데' 등등


물론 안 좋은 점만 닮은 건 아니다

우리 아들은 남자아이임에도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다

<아낌없는 나무>를 읽어주면 나무가 불쌍해서 울었고

모두가 천진난만한 유치원 졸업식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별의 슬픔을 아는 아이였다


또 지식에 대한 탐구심은 어찌나 큰지

다행히도 책을 좋아하고 문해력도 뒤지지 않는다

단언하건대, 역사와 관련해선 남편보다 아들이 아는 것이 더 많다


나는 종종 아들을 통해 아빠(필자의 아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 번은 경북 청도에 있는 카페를 찾아갔는데

그 카페가 하필이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리프트에 겨우 올라타긴 했으나 앞을 못 보는 나.

쉴 새 없이 궁시렁거리며 공포와 체면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빠.

그리고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은 아들까지

그날, 나는 3대에 걸친 유전을 목격했다.

아, 겁 많은 것도 유전일까?

철인 같은 우리 아빠도 사실은 감수성이 풍부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이에게서 보이는 나의 모습이 그저 흐뭇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직 유전이 무섭고 때로는 두렵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낮은 자존감의 영향이 크리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나와 닮은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건, '자존감'은 유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부모가 주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이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줄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많이 사랑해주고, 존중해주며 아이를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것.

그건 내가 물려줄 수 있는 또 다른 유산이 아닐까?


나는 바란다.

훗날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볼 때는

그저 그 모습이 자랑스러울 수 있기를.


설령 좋지 못한 부분을 닮았을지라도

"괜찮아~ 그건 아빠 닮아서 그래"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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